▲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29일, 희망버스에 탑승해 주세요.” 희망버스가 출발한다는 거였다. ‘6만명 잘린다’ ‘거제 노동자는 더 이상 못 참습니다’는 제목의 뉴스 기사를 다 읽고서야 나는 거제 조선노동자가 ‘더 이상 못참아’서 하는 분노의 행동이 희망버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벌써 1주일이 지난 뉴스였다. 부산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반대투쟁에서, 울산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철폐투쟁에서 출발했던 희망버스가 이번에는 대우조선해양 조선소가 있는 거제로 향한다고 탑승객을 모집을 하고 있다.



2. 중대재해, 산업재해 사망사고가 빈발하는 죽음의 공장이라 불려 왔다. 그 죽음의 공장, 조선사업장에 사내하청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몇 배로 심각하게 많다는 건 벌써 오래된 일이다. 2014년 현재 조선사업장에서 정규직 노동자는 3만5천여명이라면 사내하청 노동자는 12만7천여명이다.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등 우리 조선사업장에서 비정규직 비율은 70% 이상으로 대단히 높다. 1990년 당시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가 발표한 통계는 정규직 기능직이 3만5천여명, 사내하청이 7천여명이었는데, 이를 통해서 보면 우리 조선산업의 성장은 오로지 정규직이 아닌 사내하청이라는 비정규 노동자를 통한 거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내하청에 그 아래 물량팀에 다단계 간접고용 체계를 구축한 조선소에서 노동자들은 일해 왔다. 이런 조선사업장에서 물량팀·사내하청 등 비정규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구조조정되고 있다. 그 규모가 5만~6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래 전부터 파견근로가 아니냐고 제기하며 투쟁해 왔다. 하지만 법원에서 파견근로라는 판결이 나왔던 자동차·제철소 등과는 달리 조선소는 법적 판단을 받아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원청 사용자가 자신의 조선사업을 위해 사내하청 노동자를 사용하는 불법파견 근로의 현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자동차 생산라인처럼 컨베이어벨트에 의해서 생산공정이 흐르지 않는다고 파견근로를 인정해 주지 않는 법적 현실에 비정규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호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의 법이 외면하고 있는 사이, 현대자동차 등 자동차사업장에서 비정규직 비율이 20%를 넘지 않는 데 비해 조선사업장은 대표적인 사내하청 비정규직 사업장으로 전락해 왔다. 1990년대 후반 조선소에서 사내하청 노동자 사용이 본격화되면서부터 사내하청비정규직노조 건설투쟁도 시작됐다. 그것은 현대자동차 등 자동차사업장에서 사내하청비정규직노조 활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전개됐다. 당시 삼호중공업·현대중공업·대우조선 등에서 비정규직노조 활동에 대한 탄압은 가혹했다. 그리고 비정규 노동자의 고용 등 근로조건이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는 부서졌다. 이 나라에서 사내하청 노조 활동에 당연히 따르는 탄압의 수단, 원청에 의해서 자행되는 치밀한 탄압에 의해 비정규직노조는 철저히 그 조직·활동이 금지돼 왔다. 원청 사용자의 노무관리 차원에서 보자면 이 나라에서 조선산업은 비정규직노조 활동을 철저히 규제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사용자로 내세운 업체 사장·소장 등 하청업체가 앞장서고, 원청은 도급계약의 해지, 도급계약 갱신 거부라는 무기로 노조로 조직하려던 비정규 노동자의 분노를 짓부숴 왔다. 그래서 우리의 조선소에서 비정규직노조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거나 그나마도 유지하지 못하거나였다. 그동안 이렇게 우리의 조선소에서는 희망버스를 부를 비정규직노조 활동도 유지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오늘 바로 그 조선소에서 희망버스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3. 비정규 노동자가 부르는 희망버스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조선사업장 노동자가 구조조정에 맞서 부르는 버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정규직·비정규직을 가리지 않고 조선사업장에서 몰아닥치고 있는 구조조정에 맞서 희망버스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물량팀·사내하청이라는 비정규직을 넘어서 정규직까지 대상으로 하는 구조조정 앞에 노동자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버스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노사관계를 돌아보면 하청업체는 원청 사용자가 책임회피를 위해 내세운 것이었다. 그러니 하청업체 사용자가 해내지 못하면, 비정규직노조에 대한 사용자로서 대응은 원청에 의해 이뤄지는 것은 당연한 순서라고 볼 수 있는 것이고, 우리의 조선사업장에서 사용자들은 그렇게 했다. 그런데 노조는 아니었다. 사용자가 내세운 대로 노조는 조직돼서 활동했을 뿐이다. 원청이 사용자로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사내하청을 조직해 내세운 것인데, 그에 따라 비정규직노조는 조직돼 활동했다. 우리의 조선소들에는 이미 대규모 조직력과 투쟁 경험을 갖춘 노동조합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삼성중공업을 제외한 현대중공업·삼호중공업·대우조선해양·현대미포조선 등에서 민주노조운동으로 건설돼 활동하는 정규직 노동조합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와 별개로 비정규직노조가 조직돼 활동하다 원·하청 사용자의 탄압으로 철저히 부서졌다. 법적으로 그것이 가능하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법적 문제는 얼마든지 가능한 방법을 찾아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는 이 나라에서 노조운동의 수준이고 현실이라고 받아들였다. 사용자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정규직노조가 있는 조선사업장에서 비정규 노동자들의 노조 조직 활동은 사용자에 의해 철저히 부서졌다. 조선소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하나의 노동자가 아니었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구조조정의 방패막이로 여기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것은 우리의 조선소에서 노동자 규모에 부합하는 정도로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데 실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세계 1위라는 조선산업의 호황에 비정규 노동자의 분노는 파묻혔다. 비정규직노조가 희망버스를 부르는 것조차 어려웠던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4. 그러다 플랜트사업 실패에 유가 폭락과 세계경기 침체로 수주물량이 급감하면서 조선소에 대규모 구조조정이 밀어닥쳤다. 비정규직부터 대규모로 구조조정되고 있다. 당장 오늘 조선소 비정규 노동자들은 생존이 위태로운 지경이다. 이 나라가 조선산업을 일으킨 이래로 오늘처럼 심각했던 적이 있었던가. 당연히 노동자의 고용 등 근로조건의 유지·개선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노동조합이고, 그걸 조직하고 활동하기 위한 노동자의 운동이 노조운동이다. 그렇다면 오늘이야말로 조선소에서 노조운동이 타올라야 할 때다. 그런데 없다. 5만~6만명의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을 당해 일자리를 잃고 쫓겨나야 한다는데 없다. 그저 소리 없이 쫓겨나고 있을 뿐이다. 분명히 자신이 수년, 심지어 수십년을 근무해 왔던 사업장에서 쫓겨나는데 비정규 노동자는 분노하고 있을 것인데도, 그들의 분노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희망버스 행렬이 이어졌던 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반대투쟁에서 보여줬던 노동자의 분노만큼은 아니라도 분명히 분노의 행동이 나타나야 하는데 없다. 무엇인가.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나라에서 노조운동이 조선소 비정규 노동자의 분노를 조직하는 데 철저히 실패해 왔다는 것을 말한다. 노조가 비정규 노동자들의 희망이 아니었다는 걸 말해 준다. 비정규 노동자들이 냉정하게, 그리고 가슴이 품은 분노를 스스로 잠재우고 있을 정도로 그렇게 이 나라에서 노조운동은 비정규 노동자들의 희망이 아니었다고 그들은 행동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수만명의 조선소 노동자들은 소리 없이 구조조정당한 채 개별적으로 생존할 일을 찾아 떠날 뿐이다. 이대로라면 이 나라에서 노조운동은 희망이 없다. 구조조정으로 쫓겨나는 노동자를 그저 지켜보는 노동조합에 어떤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절망에서 희망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조직력과 투쟁력을 갖추고 있는 정규직노조라도 비정규직을 외면하는 노조에서 우리는 노조운동의 희망을 찾을 수는 없다. 아무리 희망버스가 조선소로 출발한다고 해도 이런 노조운동에서 희망을 찾을 수는 없다.



5. 10월29일, 희망버스는 조선소가 있는 거제로 출발한다. 희망버스의 조직자들은 이번에는 비정규 노동자의 희망이 되겠다고, 그들을 조직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심각하게 몰아치는 구조조정 앞에서 물량팀·사내하청의 비정규 노동자들의 분노를 조직해야 할 때다. 조선소에서 비정규 노동자의 고용 등 근로조건을 위해 노동자운동이 몰아칠 때다. 지금이야말로 희망이라는 이름의 버스를 원청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 노동자와 함께 맞이해야 할 때이다. 노동의 희망버스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하지 않고서 달린다. 노동의 희망버스는 오로지 노동의 꿈·희망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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