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

서울시에서 제공하는 일자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10여명의 청년들과 작은 간담회를 갖고 강연할 일이 생겼다. 주최측에서는 청년노동 문제에 대한 구조적 이해를 돕고, 향후 일자리 프로그램 참여 동기를 부여해 주는 내용을 요청했다. 난해한 주제라 한참을 고민하다가 참여자들에게 포스트잇을 나눠 줬다. 그리고 이전에 경험했던 일터를 떠나게 된 까닭을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정성스러운 글자가 담긴 포스트잇이 칠판에 가득 붙었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듣는데 마음이 답답해졌다. 법이 정한 노동시간을 정확히 두 배 초과하는 업무에 시달리거나, 번듯한 기업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가족·친인척들이 임원을 독점한 회사였다거나, 상사에게 미운털이 박혀 주말에 사무실에 불려 나와 아무 일도 없이 ‘벌’을 받았다던가. 당사자가 아니라면 오롯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처의 크기가 전해져 왔다.

이야기를 듣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되물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서 일을 그만두거나 회사에서 쫓겨나고 나서 실업급여를 받아 본 사람이 있느냐고. 당혹스럽게도, 혹은 예상했던 대로 딱 1명밖에 없었다. 고용보험에 가입이 안 돼 있었거나, 실업급여가 뭔지 몰랐거나, 알더라도 실업급여를 수급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거나 하는 이유였다.

평생직장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됐다. 불안정 노동의 확대라든지 노동의 유연화라는 말들은 현실을 설명하기에 너무 한가해 보인다. 1년 미만 단기계약직으로 첫 직장을 맞이하는 청년 비율은 5년 사이에 두 배 증가했고, 한국경총 조사에 따르면 갖가지 이유로 1년 이내에 퇴사하는 신입사원 비중이 30%에 육박한다.

노동시장으로의 진입과 이탈이 반복되는 현상의 원인은 다분히 구조적이지만, 실업 상태라는 틈새에서 감당해야 할 위험은 개인의 몫으로 전가된다. 이병희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의 연구에 따르면 실업 상태에 빠진 전체 임금노동자 중 실업급여를 받은 비율은 2012년 기준 16.7%에 불과하다. 실업 상태를 경험해 본 10명이 둘러앉아 있는데, 실업급여를 받아 본 사람이 한두 명에 불과한 현실을 두고 "고용보험 사각지대가 넓다"는 진단을 내리는 것은 무언가 부자연스럽다. 사각지대는 다수의 보편적 권리가 존재하고, 특수한 일부 예외가 있을 때 쓰는 말이다. 지금은 보편과 특수가 뒤집어져 있다.

고용노동부는 사업장에서 고용보험에 가입한 이력이 없더라도 사후적으로 수급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피보험 자격확인 청구제도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지원해야 한다. 또한 고용보험 가입 이력이 충분하더라도 자발적 이직에 대한 강도 높은 규제로 인해 실업급여 수급에 제한이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용보험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수급자격을 인정하는 정당한 이직 사유들이 명시돼 있지만, 까다로운 입증 절차로 인해 사문화돼 있는 경우가 많다. 시행규칙을 개정하고 일선 현장에 지침을 내려 직장내에서 괴롭힘, 임금체불, 과도한 연장근로 등 부당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퇴사할 경우 실업급여 수급권을 광범위하게 인정하고 입증 절차도 간소화해야 한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20년의 역사를 가진 고용보험제도를 대다수 비정규·불안정 노동자의 삶을 포괄할 수 있도록 개혁하고, 사각지대는 실업부조를 도입해 해소해야 한다. 10명이 둘러앉으면 여덟아홉 명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공기처럼 일상이 된 실업의 위험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것. 그것이 현대사회에서 국가가 해야 할 최우선 역할이다. 부정수급자를 잡아내는 일은 후순위여야 한다.



청년유니온 위원장 (cartney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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