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내 젊은 교사 시절 부끄러운 일화 한 토막입니다.

수업 시간,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내가 보기에는 지금 설명하고 있는 내용과 다른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당황한 나는 괘씸한 생각이 들어 내용에 대한 성실한 답변 대신 “야! 너 머리가 그게 뭐냐? 참새가 집을 짓겠네. 그렇게 길면 교칙 위반인 줄 알지?” 하며 나무랐습니다. 내가 그러자 다른 학생들은 까르르 웃고, 그 학생도 당황하며 “선생님, 제 머리가 어때서요? 이 정도가 뭐가 길어요?” 하며 오히려 달려드는 것이었습니다. “어허, 이놈 봐라. 내가 길다면 긴 거지, 어딜 기어오르고 있어.” “선생님, 쟤 좀 보세요. 쟤는 나보다 훨씬 길잖아요. 근데 왜 나만 가지고 그래요?” 하며 억울하다는 듯 씩씩거리는 품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더 따져 봤자 이로울 것 같지 않아, 괜히 봐주는 척하면서 한 발을 뺐지요. “좋아 알았어. 쉬는 시간에 교무실로 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는 사이에 학생의 처음 질문은 어디론가 사라진 것입니다. 본질은 어디 가고 비본질적인 엉뚱한 것으로 다투고 있었던 것이지요.

박근혜 정권에서 일어나는 어처구니없는 일 중에 이런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지난해 한 해 우리 사회와 교육계를 그렇게 뜨겁게 달궜던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박근혜 정권의 불통에 막혀 여러 절차의 위법성에도 불구하고 편찬위원도 공개하지 않는 ‘깜깜이’ 편찬이,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마저도 백남기 농민의 경찰 물대포 살해, 청와대의 우병우 민정수석을 비롯한 최순실 등 각종 스캔들 같은 현안에 묻혀 관심에서 사라졌다가 정기국회에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됐습니다. 교육부는 여전히 오리발 내밀기와 배 째라 식으로, 역사교과서 편찬 과정이나 내용에 대해 철저한 보안으로 일관하는 사이에 여기저기서 흘러나온 얘기나 ‘카더라 식’의 추측기사로 일부 언론만 요란스러울 뿐입니다. 대체로 쟁점이 되는 내용은 우리나라 건국 시기를 1919년이 아닌 1948년으로 한다는 것과 그렇게 함으로 인한 일제 강점기 항일투쟁과 임시정부의 법통 문제, 이승만의 복권과 박정희 유신체제의 재평가 등이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의 본질은 이것이 아닙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명백한 이유는 역사교과서를 비롯한 모든 교과서의 국정화 그 자체인 것입니다. 아무리 국가라 하더라도 어느 하나만을 교과서로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과서 논쟁은, 그 본질은 간데없고 박근혜 정권이 관철하려는 내용을 가지고 티격태격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울 뿐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서양 격언이 있습니다. 중요한 협상 과정에서 큰 흐름이나 틀에서는 합의가 됐는데, 아주 사소한 내용 때문에 협상 전체가 어그러지는 데서 생겨난 말이라고 합니다. 비본질적이고 비상식적인 것으로 본질과 상식을 흐리게 하고 뒤집어엎는 현상 등도 여기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백남기 농민의 경찰 물대포에 의한 살해의 본질은 철저한 조사에 의한 진상규명과 그 책임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지 상식 이전으로 돌아가 다시 부검이 필요하다든가, 지금 발부된 영장으로 집행을 할 수 있다든가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최근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송민순 회고록의 표현들도 본질은 어느 정부가 됐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북한 정부와 교류하며 어떤 정치적 협상을 했는가이지, 그 과정에서 일부분만을 문제 삼는 것은 치졸하고 비겁한 행위인 것 같아 한심스러운 생각만 듭니다.

마찬가지로 파업행위에 업무방해죄나 집회·시위에 공무집행방해죄 혹은 일반교통방해죄를 적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나는 그날 교무실로 불려 온 그 학생에게 사과부터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같이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일이 계기가 돼 지금도 그와 나는 친구로 힘든 세상길을 서로 위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태일재단 이사장 (president1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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