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이화여대 총장이 사퇴했다.

7년 전 베트남 여행 때 호텔방 TV로 한국영화 <타짜>를 봤다. 더빙을 하지 않아 음성은 우리말로 나오고, 화면 아래 자막은 영어였다. 중간쯤 보다가 웃음이 터졌다. 영화 속 김혜수가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고 대사를 칠 때 화면에는 ‘medical’이라는 자막이 흘렀다.

한국인이라면 김혜수의 대사가 가진 의미를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베트남 번역가가 ‘이대’가 가진 역사적 뜻을 알 턱이 없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이화여대’는 고유명사다. 이화여대는 신여성 교육은 물론이고 정치·사회·문화 모든 영역에 영향을 줬다.

1866년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에서 27살 청년 선교사가 살해돼 대동강에 떠올랐다. 같은해 양화대교 인근 절두산에도 수많은 기독교 신도와 선교사가 살해돼 한강에 버려졌다. 미국 청년의사 스크랜턴은 이 엄혹할 때 조선을 선교지로 택하고 아내와 늙은 어머니까지 모시고 1885년 9월 서울 정동에 들어와 병원을 열었다. 스크랜턴은 1886년 5월31일 가난 때문에 버려진 여자아이를 집으로 들여 기른다. 이날이 이화여대 개교기념일이다. 벌써 130년이나 지났다.

스크랜턴이 1887년 학교 건물을 짓고 신여성 교육을 표방하자 고종은 그에게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화학당 졸업생들은 이후 우리 사회 중심에 섰다. 이화 출신 첫 외국유학자는 하란사다. 하란사는 1900년 이화학당의 도움으로 오하이오주 웨슬리언 대학에서 학사를 받고 귀국해 3·1 운동 전까지 10여년을 이화에서 교사 겸 기숙사감으로 일했다. 하란사는 1919년 1월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탈출해 망명생활을 하다 44살에 거기서 숨졌다.

이화 출신 김마리아도 일찍이 3·1 운동 전에 일본 유학을 거쳐 미국에 망명했다. 김마리아는 1919년 만세운동을 앞두고 도쿄에서 2·8 독립선언문을 조선에 몰래 들여왔다. 김마리아는 전국을 돌며 선언문을 돌리다가 1919년 3월5일 잡혀 감옥에서 5개월을 살았다. 석방 뒤 김마리아는 대한애국부인회를 만들어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다가 동료 오현주의 배신으로 다시 잡혀 3년형을 받고 건강이 악화돼 구속보류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1933년 다시 국내로 돌아왔지만 44년 3월 신경병으로 숨졌다. 조선과 중국·일본·미국으로 이어지는 김마리아의 삶은 영화 <밀정>보다 다이내믹하다. 유관순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반면 이대 출신 중에는 친일 군상들도 많다. 김활란이야 대부분 알지만 이대 총장서리와 이사장을 지낸 교육자 서은숙 박사도 그렇다. 얼마 전 <뉴스타파>가 교육계에서 일본 왕의 훈장을 받은 이대 출신으로 김활란과 서은숙(1900~1977)을 소개했다.

서은숙 박사는 김활란의 고향(인천) 후배다. 세 살 위 김활란을 따라 인천에서 선교사가 세운 영화여학교(현 영화초등학교)에 들어갔다가 이화학당도 뒤따라 들어왔다. 서은숙은 1910년대 정동 이화여고 자리에 있던 이화학당에 다닐 때 맞은편 기숙사(현 예원학교)에서 김활란·유관순과 같은 방에서 살았다. 서 박사가 기억하는 유관순은 “1918년 이화학당 고등과에 입학해 나와 기숙사에서 한방을 썼다. 성격이 활달하고 선배들 심부름을 잘했다. 농구·배구 등 운동도 좋아했다” 정도다.

1919년 만세운동 때 김활란은 독립운동 자금모금책이라는 이유로, 서은숙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안 좋았다는 이유로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방에서 먹고 자던 셋 중 막내 유관순은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를 버리고 고향 목천으로 내려가 아우내장터에 섰다.

1919년 만세시위가 하란사·김마리아·유관순을, 김활란·서은숙을 분리시켰다. 이처럼 독립운동과 친일활동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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