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고비아 알카사르에서 내려다본 마을 모습. 중세 장원의 모습이 어린다. 연윤정 기자
▲ 쇠퇴하던 철강도시 빌바오는 구겐하임미술관을 유치해 문화도시로 탈바꿈했다. 연윤정 기자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의 불길처럼 힘차게 타올라/ 대지의 저주받은 땅에 새 세계를 펼칠 때/ 어떠한 낡은 쇠사슬도 우리를 막지 못해/ 들어라 최후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참자유 평등 그길로 힘차게 나가자/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인터내셔널가 중에서)

바르셀로나를 떠나 게르니카로 가는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답사단 버스 안에서 인터내셔널가가 울려 퍼졌다. 아는 사람은 아는 대로,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대로 배우면서.

스페인 내전 당시 세계 53개국 3만5천여명의 의용군이 공화국을 지지하며 참전했다. 영국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에는 국제여단 동료가 전투 중 사망하자 장례식을 치르며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인터내셔널가는 전 세계 노동자를 하나로 묶는 힘이었다.

쇠퇴하는 철강도시 빌바오 문화도시로 탈바꿈

10월4일 답사단은 빌바오를 방문했다. 빌바오는 바스크 지방의 중심 도시다. 15세기 이래 인근 지역 철광석을 바탕으로 제철업이 발달해 영국을 비롯한 인근 여러 나라에 수출했다. 중세시대 유행한 ‘빌보 검’이 이곳에서 나왔다. 빌바오는 제철뿐만 아니라 금속·기계·화학·유리·도자기·담배·조선업이 발달한 공업도시다.

하지만 철강산업이 쇠퇴하고 바스크 분리주의자 테러가 잇따르면서 쇠락의 길을 면치 못했다. 이런 빌바오를 구한 것이 구겐하임미술관이다. 바스크 정부는 빌바오가 몰락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문화산업이라고 판단하고 1991년 구겐하임미술관을 유치했다.

이런 전략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구겐하임미술관은 빌바오를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97년 완공된 50미터 높이의 티타늄판 구조물로 이뤄진 미술관은 3개 층의 전시공간이 동심원적으로 돌아 올라가면서 위성 전시공간을 배치하고 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클레이즈 올덴버그 설치작품을 비롯해 팝아트·미니멀리즘·추상주의 같은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답사단이 찾았을 때에는 프란시스 베이컨(1909~1992) 특별전이 열려 눈길을 모았다.

김진웅 가이드는 “빌바오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살기 좋은 곳은 아니다”며 “구겐하임미술관이 도시 살리기 선봉장이 돼 빌바오를 철강도시에서 문화도시로 바꿨다”고 말했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빌바오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37년 4월 게르니카 폭격 뒤 아라곤 전선의 요충지였던 빌바오는 치열한 전투 끝에 반란군으로 넘어갔다. 그 뒤 공화국 진영에 남아 있던 북부지역 공업지대가 하나둘 반란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 백설공주의 성 모델로 알려진 세고비아 알카사르. 연윤정 기자
▲ 세고비아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길에서 십자가가 보인다. 최승회 현대제철지회 조합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주요 무대를 지나

답사단은 빌바오를 떠나 세고비아로 향했다. 빌바오에서 세고비아를 거쳐 마드리드로 이어지는 길은 스페인 내전 당시 과다라마 산맥이 걸쳐진 아라곤 전선으로 불리는 요충지였다.

모로코를 건너 진격하던 프랑코군(아프리카 군대)은 1936년 9월 톨레도 수호에 성공한 뒤 10월에 수도 마드리드를 공격한다. 마드리드 점령은 쉽지 않았다. 3천명의 국제여단과 마드리드 노동자·시민들이 결사항전을 벌이며 프랑코군의 수개월에 걸친 무차별적 공세를 막아 냈다.

결국 프랑코군은 마드리드를 우회해 공화국 진영이 장악하고 있는 북부지역을 공격하기로 전략을 바꾼다. 그래서 빌바오와 게르니카가 우선적인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세고비아는 이때 반란군 진영으로 넘어갔다가 게르니카 폭격 뒤 공화군의 반격으로 탈환되기도 했다.

특히 해당 지역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주요 무대가 됐던 곳이다. 헤밍웨이는 국제여단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주인공 로버트 조던이 험준한 산에서 반란군이 장악하고 있던 다리를 폭파한 뒤 부상을 입고 죽어 가면서 사랑하는 여인 마리아를 떠나보내는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또 하나, 빌바오에서 세고비아로 가는 길에 카스티야 지방의 부르고스를 지나치게 된다. 부르고스는 반란군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프랑코는 1937년 1월 부르고스에서 첫 내각을 발표한다. 합법적인 공화국 정부를 부정하고 부르고스를 수도로 삼아 반란군 정부를 세운 것이다. 프랑코가 국가수반이 돼 입법·사법·행정권을 독점한다.

스페인 고대와 중세의 모습 간직한 세고비아

빌바오를 떠난 지 5시간 만에 세고비아에 도착했다. 세고비아는 마드리드에서 1시간 거리의 해발 1천미터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카스티야 지방 세고비아주의 주도다.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10세가 수도로 정한 뒤 카스티야 왕국의 정치·문화 중심지였다.

이곳은 디즈니사의 만화영화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성의 모델로 알려진 알카사르로 유명하다. 가장 전망 좋은 언덕에 왕과 왕비가 살았던 알카사르가 있다. 현재 건축물은 1862년 화재로 불탄 것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이사벨 1세의 즉위식과 펠리페 2세의 결혼식이 열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성 안에는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 카를로스 3세 등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봉 왕가의 역대 왕들의 흉상이 진열돼 있다. 금빛 찬란한 왕좌와 옛 가구, 왕가나 전투를 표현한 각종 태피스트리와 그림, 기사들의 갑옷과 각종 무기 등 화려한 왕가의 생활상을 엿보게 한다. 각 방의 천장이나 벽면은 무데하르 양식으로 장식돼 있다.

답사단은 알카사르를 나와 중세풍 거리를 걸어 대성당(카테드랄)을 거쳐 로마 수도교를 방문했다. 세고비아는 무슬림·기독교인·유대인이 16세기까지 함께 살았던 도시다. 거리에는 그들의 흔적과 문화가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게다가 고대의 로마 수도교가 위용을 떨치고 있다.

1세기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강물을 마을로 끌어오기 위해 지어진 로마 수도교는 보존상태가 훌륭했다. 1884년까지 이를 이용해 물을 썼다고 한다.

스페인은 처음 로마의 침략을 받았을 때 가장 격렬히 저항했지만 로마 제정기 로마의 5현제 중 2명(트라야누스·하드리야누스)을 배출할 정도로 로마화된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정치·경제·사회·문화가 안정되고 번영된 문명국가로서 자리했다는 의미다.

▲ 스페인 내전 당시 반란군이 공화군의 공세에 맞서 톨레도 알카사르 사수에 성공한다. 오른쪽 탑이 2개 보이는 곳이 알카사르다. 연윤정 기자
▲ 마드리드 스페인 왕궁 앞에서 답사단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성열 한국지엠지부 조합원

“No Pasaran!(통과할 수 없다!)” 마드리드의 결기

답사단은 세고비아를 뒤로 하고 1시간 거리 마드리드로 향했다. 마드리드. 그 최후를 알기에 마음이 심하게 요동친다.

“노 파사란!(No Pasaran!·그들은 통과할 수 없다!)”

단 한 명의 프랑코군도 통과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마드리드의 결기였다. 그리고 마드리드는 해냈다. 프랑코는 1936년 10월 마드리드 공격을 시작했는데, 11월에 무차별적인 공중폭격과 포격을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해를 넘겨 1937년 1~2월 또다시 마드리드에 맹공을 펼쳤다. 이때 희생된 사람만 양군을 합쳐 1만5천여명이다.

공화국 정부는 1936년 11월 스페인 동쪽 지중해에 면한 제3의 도시 발렌시아로 정부를 옮긴다. 마드리드를 남기고 떠난 것이다. 그러나 국제여단 3천명과 노동자·시민들이 공화국을 사수하기 위해 결사항전을 하면서 프랑코군의 함락을 막아 낸다.

프랑코는 마드리드를 우회해 북부지역을 공격하고 그 승기를 바탕으로 아라곤 전선에서 공화군을 물리치면서 동쪽으로 점차 점령지를 넓혔다. 공화국 정부도 떠나고 프랑코도 떠난 2년간 마드리드는 고립된 채 싸움을 이어 갔다.

“여러분, 오른쪽 산등성이에 십자가가 하나 보일 거예요. 거기가 바로 프랑코 무덤입니다.”

세고비아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길엔 스페인 내전의 흔적이 유령처럼 자리하고 있다. 프랑코는 1939년 4월1일 공화국 정부의 항복을 받고 스페인 내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절대권력을 지닌 총통으로서 36년간 스페인을 지배했다.

그는 일찌감치 엘 에스코리알의 화강암 바위산에 자신의 무덤과 성당(바실리카), 수도원을 건축한다. 이른바 ‘전몰자의 계곡’이라 불린다. 내전이 끝난 뒤인 1940년 착공해 1958년 완공했다. 2만명의 공화파 포로들이 동원됐다고 한다.

프랑코는 국민화합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공화군과 반란군을 포함해 스페인 내전에서 숨진 5만명의 전몰자들을 이곳에 안장했다. 1975년 사망한 프랑코 자신은 성당 지하무덤에 안장돼 있다. 152.4미터 높이의 초대형 십자가가 바위산 꼭대기에 세워져 있다. 이곳은 반란군을 선의 수호자로 상징화한 곳이자 프랑코 개인 묘지로서 극우세력의 성지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공군자 서울노동광장 집행위원장은 “이번 답사를 하면서 스페인 내전과 관련한 기념물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며 “프랑코 승리의 역사만 거대한 상징물로 남아 있어 씁쓸하다”고 말했다.

스페인 옛 수도이자 가톨릭 본산 톨레도

답사단은 이날 저녁 늦게 마드리드 시내에 입성했다. 늦은 식사를 한 뒤 버스를 타고 마드리드 번화가 ‘큰길’이란 뜻의 그란비아 거리를 지나 외곽에 있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버스를 타며 본 마드리드의 거리는 잘 정돈돼 있고 활기가 넘쳐 보였다.

답사단 일정은 살인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상 스페인 답사 마지막날인 다음날에는 톨레도와 마드리드 2곳을 한꺼번에 돌아봤다.

10월5일 오전 답사단은 마드리드에서 1시간 거리의 톨레도로 출발했다. 톨레도는 1560년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기기 전 스페인의 수도이자 정치·문화의 중심지로 유서 깊은 곳이다.

“우와, 전형적인 중세도시네요. 산과 강에 둘러싸인 천연 요새이기도 하고요.”

답사단은 아름다운 중세도시의 모습을 간직한 톨레도의 모습에 감탄을 거듭했다.

이곳은 엘 그레코의 유명한 작품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 보관돼 있는 산토 토메 성당(이글레시아·iglesia)과 톨레도 대성당(카테드랄)으로 유명하다. 그리스인이란 뜻의 엘 그레코는 펠리페 2세의 궁정화가였다. 스페인으로 왔다가 톨레도에서 40년간 살다가 생을 마감했는데, 벨라스케스·고야와 함께 스페인 회화 3대 거장으로 분류된다.

초기 고딕에서 프랑스 고딕양식까지 어우러진 대성당은 1227년 착공해 266년 만인 1493년 완공됐다. 현재 스페인 가톨릭의 총본산이다. 그래서인가, 톨레도 대성당은 여태까지 봤던 어떤 성당보다도 가장 화려했다. 원래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길이 113미터, 너비 57미터, 높이 45미터의 거대한 규모다. 수많은 귀족들의 기도실이 있다. 보물실은 전체가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다.

답사단의 한 일원은 “온통 금빛으로 번쩍여서 솔직히 속이 안 좋다”며 “중세시대 이렇게 화려한 성당을 지으려고 얼마나 많은 민중을 수탈했을까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 마드리드 스페인 광장에 있는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 기념탑. 소설 속 인물인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보인다. 연윤정 기자
▲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전 세계에 고발한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국립소피아왕비예술센터에 전시돼 있다. 자료사진

프랑코의 신화가 된 톨레도 알카사르 전투

“알카사르 이상 무!”

톨레도는 스페인 내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다. 마드리드 코앞에 있는 톨레도는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자마자 반란군이 장악했다. 알카사르가 반란군 거점이었다. 알카사르 바로 앞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일부 생도들도 반란군에 합류했다.

1936년 8월 공화국 의용군은 톨레도를 탈환하기 위해 알카사르 밖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총공세를 폈다. 하지만 공화군 대포는 알카사르의 두터운 벽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공화군이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반란군 모스카르 대령의 아들을 인질로 이용한 것이다. 모스카르는 항복하라는 공화군의 요구를 거절하며 아들에게 용감하게 죽으라고 한다.

그리고 9월 모로코를 건너 북진하던 프랑코군은 톨레도에 도착해 공화국 의용군을 격퇴했다.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에는 “반란군의 의용군에 대한 보복살인으로 흘린 피가 도시의 경사지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흘러내렸다”고 표현돼 있다. 이때 모스카르 대령은 “알카사르 이상 무!”라는 인사를 프랑코와 그를 따라온 기자들에게 한다.

톨레도 알카사르 수호는 반란군의 여러 장군들 중 하나였던 프랑코의 입지를 독보적으로 세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프랑코는 이 전투를 신화적 수준으로까지 격상시켰다. 현재 톨레도 알카사르는 무기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톨레도 전투 당시 반란군과 공화군 간 전투가 벌어졌던 건물입니다. 총탄 자국이 엄청 많이 남아 있죠?”

김진웅 가이드가 톨레도 시내의 3층짜리 건물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반란군은 카지노로 쓰였던 이 건물을 점령한 뒤 공화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내전이 끝난 뒤에도 카지노로 쓰이다가 어느 순간 빈 건물로 남았다고 하더라고요. 한동안 건물을 판다는 현수막이 있었는데 최근 없어진 걸 보니 팔린 모양이군요.”

왕정으로 돌아간 스페인 왕실과 궁전의 현주소

이날 오후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들어왔다. 답사단이 마드리드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왕궁이다. 당초 마드리드는 10세기 톨레도를 방어하기 위해 무슬림이 세운 성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1083년 카스티야 알폰소 6세가 탈환했다. 펠리페 2세 때 수도가 된 뒤 궁전이 세워졌지만 1734년 화재로 소실된 뒤 1738년 펠리페 5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닮은 궁전을 새로 지었다. 1764년 완공됐다.

왕궁 내에는 3천개에 가까운 방이 있다. 일반인에게는 50개 정도만 공개된다고 한다. 왕궁의 첫 번째 방에는 현재 왕실 가족 사진이 걸려 있다.

1975년 프랑코는 사후 자신의 후계자로 제2공화국이 세워지면서 망명한 알폰소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를 지목했다. 스페인의 왕정(입헌군주제)이 복고된 것이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 사후 민주화를 추진해 77년 40년 만에 총선을 실시했고, 81년 군부 내 극우파의 쿠데타를 실패로 돌리게 했다. 그는 2014년 딸인 크리스티나 공주 부부의 부패 스캔들로 왕실에 위기가 닥치자 아들 펠리페 6세에게 왕위를 넘겼다.

김진웅 가이드는 “펠리페 6세에게는 어린 딸이 둘 있는데 이들이 연간 1만8천유로(2천221만원)를 받는다”며 “스페인에서는 왕정을 없애자는 여론이 많다”고 귀띔했다.

유럽의 왕궁 중 가장 화려하다는 스페인 왕궁을 나온 답사단은 스페인 광장, 프라도 미술관, 국립소피아왕비예술센터를 차례로 방문했다.

마드리드 최고 번화가 그란비아가 시작하는 곳에 있는 스페인 광장에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작가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1547~1616) 서거 300주년을 기념한 탑이 있다. 기념탑 앞에는 세르반테스 동상과 함께 소설 속 주인공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동상이 있다. 무모할 정도의 열정과 패기, 때로는 날카로운 직관력을 가진 시골기사 돈키호테와 그의 엉뚱한 여행길에 동참하는 종자 산초 판사가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아 반가웠다.

피카소 <게르니카>가 증언하는 스페인 내전

프라도 미술관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곳이다. 1819년 페르난도 7세가 역대 황실 소장품을 한곳에 전시하기 위해 만들었다. 개관 당시 311점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3천여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스페인 회화 3대 거장인 벨라스케스·고야·엘 그레코를 비롯해 카라바조·루벤스·렘브란트·무리요·뒤러 등 15~18세기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가득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고야의 <옷을 입은 마하> <옷을 벗은 마하> <1808년 5월3일 마드리드>, 엘 그레코의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가 잘 알려져 있다.

국립소피아왕비예술센터에는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전시돼 있는 곳이다. <게르니카>가 전시돼 있는 206번방에 들어서자 어떤 압도하는 힘 때문에 숨이 턱 막혔다. 생각보다 작품 크기가 컸다. 독일군 폭격에 갈기갈기 찢긴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 작품은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뒤 프랑코 치하 스페인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스페인이 민주화됐을 때 돌려받는다는 조건으로 미국 뉴욕박물관에 기증됐다가 1981년에야 지금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6번방 앞에서는 스페인 내전 당시 기록영상을 따로 틀어 줬다. 시간이 없어 다 보지는 못했지만 전장으로 가는 사람들, 그들을 보내는 사람들,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이 빠르게 흘러갔다.

206번방 근처에서 또 다른 작가가 스페인 내전을 표현한 작품이 눈에 띄었다. 안토니오 로드리게스 루나(1910~1985)가 1937년에 그린 <콜메나르비에호(Colmenar Viejo)의 폭격>이라는 작품이다. 마드리드 외곽지역인 콜메나르비에호에 대한 반란군의 공중폭격을 담고 있다. 도시가 불타면서 파괴되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울부짖는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

노동자 군대가 사수한 공화국 수도의 함락

답사단은 스페인의 마지막 밤에 플라멩코를 감상했다. 플라멩코는 원래 집시들의 예술로 푸대접을 받았으나 지금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전통예술로 자리 잡았다. 집시들의 한 많은 역사와 정서를 춤과 노래로 녹여냈다. 우리의 풍물과 닮았다.

반란군은 게르니카 폭격 뒤 북부지역을 차지하고는 아라곤 전선에서 공화군을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며 동진했다. 공화군은 국제적 고립 속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는 반란군을 당해 내지 못했다.

자유진영인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준비하는 독일을 견제하느라 불간섭주의를 내세우며 공화국을 외면했다. 스페인이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처럼 될 것이라는 의심도 한몫했다.

그러는 사이 히틀러의 독일은 콘도르 군단을 포함해 1만9천명,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5만명이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했다. 뿐만 아니라 게르니카에 쏟아부었던 것 같은 최신 무기를 반란군에 지속적으로 공급했다. 반면 공화국을 돕는 국가는 소련과 멕시코뿐이었지만 소련은 군사고문 700명 파견, 멕시코는 낡은 무기 지원에 그쳤다. 반란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여기에 인민전선 정부는 내전 초기 대응에 실패한 뒤로 이념 갈등을 겪으며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공화국을 지켜 낸 사람은 노동자와 민중이었다. 스페인 노동자 군대는 공화국을 사수하기 위해 직접 총을 들고 싸웠고 기꺼이 피를 흘렸다. 또한 전 세계 53개국에서 노동자와 지식인이 국제여단 이름으로 공화국을 위해 싸웠다. 국제여단이 1938년 9월 철수할 때에는 3만5천명 중에서 7천명만이 남았다.

스페인 내전 당시 2년간 고립된 채 공화국을 사수했던 마드리드는 1939년 1월 바르셀로나가 반란군에 점령당한 뒤인 3월에 마침내 함락되고 만다. 공화국 정부가 임시수도로 머물렀던 발렌시아도 점령당하면서 4월1일 프랑코는 공화국 붕괴를 선언했다.

살루드! 스페인 혁명은 잊히지 않았다

스페인은 프랑코 사후 입헌군주제가 되긴 했지만 민주화의 길을 차근차근 밟아 갔다. 스페인 내전 뒤 멕시코로 망명했던 스페인 사회주의노동당(PSOE) 등 공화파 사람들이 돌아왔다.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사회주의노동당은 1982년 총선에서 압승했다. 그 뒤에는 사회주의노동당과 보수우파인 국민당이 왔다 갔다 집권하는 상황이다.

스페인은 과거사 청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2007년 10월 ‘역사적 기억법’을 통과시키고 그해 12월 발효시켰다. 법의 뼈대는 내전과 독재치하 사법 판결의 정당성 부정, 프랑코 독재 상징물 철거, 희생자 유족에 대한 금전 보상, 방치된 희생자 주검 발굴, 내란 관련 문서보관서 설치 등이다. 하지만 이 역시 보수우파인 국민당을 비롯한 프랑코 세력이 건재한 상황에서 한계가 있다고 한다. 김진웅 가이드는 “좌파정권에서 우파정권으로 바뀌면 슬그머니 중단되는 식”이라며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스페인에서는 내전이 끝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 있다. 바로 축구다. 카탈루냐 지방의 바르셀로나를 연고지로 하는 FC 바르셀로나와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를 연고지로 하는 레알 마드리드는 숙명의 라이벌이다. FC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 자치를 인정한 공화국을 지지했다. 마드리스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주의를 표방한 프랑코 독재치하에서 숱한 탄압을 받았다.

마드리드에서의 일이다. 마드리드 시내를 걷다가 답사단 중 누군가 “(FC 바르셀로나 선수인) 메시 티셔츠 샀어?”라고 묻자, 옆에서 “여기선 (레알 마드리드의) 호날두만 얘기해”라고 답했다. 두 축구팀뿐만 아니라 두 지역 사람 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답사단은 짧은 여행기간 중에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공화국을 마지막까지 외롭게 사수했던 도시가 바로 마드리드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필요가 있다.

“살루드!(salud·안녕!)”

스페인 내전 시기 공화국 진영인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는 격식을 차린 “부에노스 디아스(Buenos dias·안녕하세요)” 대신에 격식 없이 “살루드”라고 인사했다고 한다. 인명 앞에 붙이는 존칭인 ‘세뇨르’나 ‘돈’이라는 표현도 ‘동지’로 바뀌었다. 스페인 혁명의 정신이 느껴진다.

김정근 답사단 단장은 “프랑코 사후 다시 좌파정부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결코 스페인 혁명이 잊힌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한국과 정말 많이 닮았다는 점에서 스페인을 새롭게 보게 됐다”고 말했다.

최승회 답사단 집행위원장은 “외세에 시달리고 내전에 독재까지 겪은 스페인의 현재는 활기차고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며 “지금의 이런 경제발전과 여유로움은 과거 수없이 싸우면서 죽어 간 노동자들의 희생이 기초가 됐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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