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의 사망원인 ‘자살(목맴 추정)’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업무상 사유에 의한 질병으로 인정한다.”

노조탄압에 따른 스트레스로 중증 정신질환을 앓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에 이른 고 한광호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 조합원이 산재를 인정받았다. 고통 속에 생을 마감한 지 216일 만이다.

근로복지공단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18일 고인의 유족으로부터 산재 청구를 위임받은 지회가 올해 4월 공단에 제기한 유족급여·장의비 지급 청구와 관련해 “업무와 사망 간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정했다. 고인이 죽음에 이른 결정적 원인이 ‘회사의 괴롭힘’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회사의 징계압박이 극단적 선택 부추겨"

고인은 3월17일 오전 충북 영동군의 한 공원 쉼터 처마에 옷끈과 허리띠를 이용해 목매 숨진 채 발견됐다. 고인은 사망하기 일주일 전 회사로부터 ‘사실조사 출석요구’를 받은 상태였다. 유성기업 취업규칙은 7일 이상 무단결근한 직원을 징계하도록 하고 있는데, 창사 이래 한 번도 적용된 바 없는 사문화된 조항을 근거로 회사는 고인에게 징계위원회 출석을 요구했다.

중증 정신질환으로 정상출근조차 힘겨워했던 고인에게 회사의 징계 압박이 강력한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게 지인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실제 고인은 2013년 지회가 전문가에 의뢰해 진행한 다면적 인성검사(MMPI)에서 우울증 고위험군 진단을 받았다. 당시 검사보고서를 보면 고인이 겪었을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고인은 대면상담에서 “회사가 어려운 상황에서 (지회) 간부를 맡고 있고, (회사로부터) 2개월 징계를 받은 상태라 심리적·경제적으로 어려움이 크다”며 “하지만 회사 상황이 어렵고 주변 동료 모두가 힘든 상태라 도움을 청하거나 치료를 받을 수 없어 혼자 삭이며 지낼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고인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보다 못한 동료들이 여러 차례 병원 치료를 권유했지만, 고인은 “나만 힘든 게 아닌데 어떻게 지금 병원에 가니”라고 말하거나 “형도 해고된 마당에 내가 입원이라도 하게 되면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하느냐”고 손사래를 치면서 고사했다.

고인의 언행이 평상시에 비해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유성기업 노조탄압 배후에 원청인 현대자동차가 깊숙하게 개입해 있다는 증거들이 공개된 뒤다. 지인들에 따르면 고인은 “우리가 이 투쟁 이길 수 있겠냐. 정말 현대차가 유시영 (회장) 뒤에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길 수 있느냐”며 크게 낙담한 모습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와중에 회사로부터 사실조사 출석요구를 받게 되는데, 고인은 이를 징계해고를 위한 요식행위로 인식하고 극심한 불안감을 호소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치료전력 없는 정신질환에 의한 자살도 산재"

회사측은 고인의 죽음과 업무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점을 강변해 왔다. 회사측은 “고인은 알코올성 명정상태(술에 취해 의사능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자살한 것으로 보이고, 설령 우울증이 있었더라도 이는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불법적인 노조활동이나 불법적인 쟁의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회사는 “고인의 자살경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거동이 불편한 노모의 부양문제로 인해 이부동복형과 마찰이 잦았다”고 주장하며 고인을 모독하는 언행도 서슴지 않았다.

질병판정위는 그러나 회사측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질판위는 “중증의 우울증 상태에서 발생한 사고로 보이고, 음주와 병원치료를 거부한 것은 고인의 문제로 여겨진다”면서도 “고인이 그렇게 판단하기까지 과정 역시 업무와 관련한 스트레스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사료되고, 수년간 노조활동 관련 갈등으로 우울증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건 발생 1주일 전 발송된 사실조사 출석요구서가 고인에게 정신적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여지고, 자살 당일의 행동이 일상적이지 않아 판단력 상실 상태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점으로 보아 업무와 사망 간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질판위 위원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고인의 죽음이 산재로 인정됐다.

사건을 대리한 이상철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이유)는 “그동안 근로복지공단은 우울증세 같은 정신질환으로 병원 치료를 받지 않은 노동자의 자살에 관해 유족급여청구를 불승인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며 “고 한광호 노동자에 대한 공단의 이번 판단으로 과거 정신질환으로 병원 치료를 받지 않았더라도 자살과 업무와의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면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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