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동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실장

일요일과 겹쳐 크게 느끼지는 못했지만 지난 9일은 한글날이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 반포(세종실록 1446년 음력 9월)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국경일로 지정했다. 지난 2012년부터는 다시 공휴일로 지정하여 우리글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더 크게 되새기고 있다.

한글날이 돌아오면 매년 각종 매체는 저마다 한글을 훼손하는 잘못된 표현을 지적한다. ‘우리말’을 바로 사용하자는 취지다. 훈민정음해례에서는 세종대왕이 직접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린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며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라고 창제 취지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500년이 지난 오늘에도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그토록 원하던 뜻과 더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말과 한자”와 통하는 것을 넘어 “말과 한글(유사 한글)”이 통하지 않고 있다. 영어도 아닌 알파벳이 난무하고 SNS에서는 이모티콘과 해부된 한글 자모가 섞이지 않으면 아예 대화가 되지 않는다.

사회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언어의 품격을 넘어 그 의도를 의심하게 하는 말도 차고 넘친다. 노사문제에서도 그렇다. 우리말을 지키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자들도 스스럼없이 망언을 쏟아 내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노동귀족'이라는 말을 꼽을 수 있다. 일방적 정책 강행이 어려워질 때면 정부와 편향된 언론에서는 앞다퉈 “노동귀족이 자기 밥그릇을 챙기려 한다”고 노동활동을 싸잡아 비난하고 나선다.

‘노동(자)’과 ‘귀족’이라니, 과연 이 둘은 어울리는 말인가. 양자 간 논리적 모순은 없는가. 아름다운 우리말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한글날이 돌아오고 공공과 금융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이어 가는 요즘, 자연스레 이런저런 의문이 든다.

사전적 의미로 귀족(貴族)이란 “혈통이나 문벌에 의해 사회적 특권을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나 그 일족, 또는 그 신분을 말한다”고 한다. 많게는 세습되지만, 특별한 공적에 의해 새로 귀족이 될 수도 있음을 그 특징으로 열거한다. 유럽이라면 “○○○가문”정도라고 할까.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성골이나 진골 가문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가까운 역사에서 ‘노동자’는 1917년 러시아혁명의 주체로 등장했다. 이 시기에는 인간다운 삶을 주장하는 노동자의 목소리가 세계의 큰 조류이기도 했다. 과연 이들이 귀족이었던가. 당시 혁명의 주체는 진정한 의미에서 육체와 정신을 써서 일하는 자였다. 오히려 귀족의 폭정과 자본에 반기를 든 이들이 아니었나. 결국 동서양 교과서를 훑어봐도 노동자가 귀족인 적은 없었다. ‘노동귀족’은 사실에 반하는 형용 모순이다.

노동자를 귀족인 양 덧씌우려는 의도는 분명하다. 공격의 대상으로 정하고 궁극에는 노동자들끼리 갈등을 키우겠다는 속셈이지 않겠나. 그러나 이런 목적은 현재 제도(법률) 위반이다. 임금이 많다는 것을 원인으로 삼아 노동자를 귀족으로 몰고 정당한 권리행사를 막아 볼 요량이면 헌법과 법률도 모르는 무식한 발상이다.

왜냐하면 임금노동자이기만 하면 원칙적으로 노동법의 적용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과 노동법은 임금이 얼마건 상관없이 산업재해로부터 보호를 받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단체협약을 체결할 권리가 있다. 만약 노동법 적용대상에서 고임금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싶으면 법을 바꾸고서나 가능한 말이다.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귀족노동자’ 아닌 노동자들도 있을 것이다. 가슴 아프지만 아마도 그 대척점에 1천500만 비정규 노동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귀족이라 욕하면서 과연 이들을 위해서는 무슨 일을 했단 말인가. 최저임금조차 제대로 해결할 의지가 없는 이들이지 않는가.

아예 생각을 바꿔 보자. 모든 노동자들이 귀족이 되면 또 어떤가. 그만큼 귀하게 존중해 줘야 하지 않겠나. 귀족까지는 아니더라도 넉넉한 수익을 얻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복지국가’든 ‘선진국가’든 ‘창조국가’든 그 최종 목표 중 하나는 분명 “모든 노동자들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데 있다. 한글날을 맞아 모두가 우리말 ‘노동자’라는 말부터 바로잡아 사용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실장(변호사) (94kimhy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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