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근로자라고 불러야겠다. 대한민국 법은 노동자를 근로자로 명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랜만이다. 노동자권리 타령으로 살아온 내가 노동법의 사람·근로자를 새삼스럽게 들여다보고 있다. 이 나라에서는 날마다 근로자를 말하며 시끄러운데 말이다. 오늘도 회사의 분할·매각·폐업 등 사용자의 처분에 따라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이도 근로자고, 파업을 한다고 비난받는 이도 근로자다. 이 나라에서 하급신분의 비정규직도, 언제부턴가 그에 대비해 말해지는 대기업 정규직도 근로자다. 이 세상에 태어나 결코 되고 싶지 않은 직업도, 그토록 되고 싶어하는 직업도 근로자로서 한다. 삼성전자 사내하청 비정규직도, 상무·전무 등 고위직도 근로자다. 국가가 보호해 줘야 할 사람인지조차 의심스런, 이미 충분히 보장받고 있는 이도 법적으로는 근로자다. 대한민국에서는 도대체가 근로자다.



2. 헌법을 보자. 대한민국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는 것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선언하고 있다(제10조). 사실 조문에 규정하고 있는 평등권·자유권·사회권 등을 일일이 명시하지 않아도 이 제10조만으로도 대한민국 국민은 국가 대한민국에 의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맘껏 행복을 추구할 수 있어야 했다.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굳이 노동자를 근로자로 부르며 헌법으로 뭔가를 기본권으로 보장하겠노라고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대한민국은 다른 국민과는 달리 근로자에게 특별히 근로의 권리와 노동기본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하노라고 규정했다. 국가는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고 법률로 정해 “최저임금제를 시행”하도록 하고(제32조1항),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하며”(동조 제3항), 여자·연소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하도록 하고 있다(동조 제4항, 제5항). 국가가 고용·임금, 기타 근로조건의 기준을 보장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근로자 아닌 국민에게는 보장하지 않은 근로자의 기본권을 국가가 보장한 것이다. 국가가 최저기준을 보장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근로기준법·최저임금법·남녀고용평등법·고용보험법 등 법률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그렇다고 헌법이 하라는 대로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이라고 단정 짓기는 거시기하다. 기간제법·파견법 등 비정규직 관련법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봐야 하는지는 물음표다. 비정규직 사용을 허용하는 법이니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 근로조건의 최저기준은 국가가 법률로 정해서 근로자를 보호하고 있으니, 근로자는 국가로부터 특별히 보호받아야 할 기본권을 보장받은 거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헌법은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해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노동기본권을 근로자의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제33조1항). 근로자는 자신의 근로조건 향상을 위하여 단결권, 즉 노동조합 등 근로자 단결체를 만들어 활동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특히 단체협약 체결 등을 위해 단체교섭을 하고 파업 등 단체행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한 것이다. 이것은 위 헌법 제32조에서 보장한 근로자의 기본권, 근로의 권리만으로는 근로자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 국민으로서 살아가기 어렵기에 보장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 이상과 같은 근로자의 기본권을 보장한 헌법을 읽어 보면, 대한민국에서 근로자에게 국가가 근로조건의 최저기준을 보장해 주지만, 그보다 높은 수준의 것은 근로자들이 단체를 조직해서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행사해 스스로 관철하라고, 그럴 수 있는 권리를 기본권으로 보장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헌법에서 근로자는 그저 사회적 약자로서 보호할 대상이 아니다. 스스로 단결해서 교섭과 투쟁할 힘을 갖춘 자주적인 인간인 것이다.



3. 근로기준법은 근로자를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라고 정의하고 있다(제2조1항 제1호).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해야 하는 자이니, 단순히 일하는 자를 근로자라고 하지 않았다. 사용자에 복종해서 그 지휘·명령에 따라 일하는 ‘근로’를 제공하는 자만이 근로자라고 정의한 것이다. 적어도 사업장에서의 일에서는 사용자는 주인이고, 근로자는 그에 복종해야 하는 이다. 그런데 그런 이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이라니 국가는 근로조건의 최저기준을 이 근로기준법으로 정한 것이다. 그래서 해고·전직 등 사용자의 인사권행사를 규제하고, 임금·퇴직금·근로시간·휴가, 안전과 보건, 재해보상 등에 관해서 규정하고 있다. 그 기준을 위반한 근로계약은 무효고 위반한 사용자는 처벌까지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근로자를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보장된 국민으로서 보호하려면 주인에 복종하는 노예로 취급되는 걸 규제해야 했다. 일, 즉 노무제공에 있어서는 아니라도 그에 따른 근로조건을 정하는 데 있어서는 노예로 취급돼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명확히 선언해 둬야 했다. “근로조건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하도록 하고(제4조), 취업규칙 변경 등에서 근로자측의 동의 등 절차를 거치도록 한 것은(제94조) 근로자가 노예로 취급돼서는 안 된다는 취지가 반영된 근로기준법 규정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 만약 근로조건을 사용자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정하지 못하는 근로자가 있다면, 근로기준법을 집행하는 고용노동부·법원 등은 사용자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근로기준법의 근로자는 사용자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근로조건을 정할 수 있는 자라고 선언돼 있다. 사용자가 정해 주는 대로 따라야 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동등하지 못한 지위에서 사용자로부터 자유의사를 제약받고서 근로계약 등으로 자신의 근로조건을 정하지 말라고 근로기준법은 근로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가 법률로 보호할 대상인 근로자라도 자신의 근로조건을 정함에 있어서는 사용자와 동동한 인간이라고 근로기준법은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동등하지 못한 지위에서 자신의 의사가 제압된 상태에서 근로조건을 사용자가 정하는 대로 정하고 있다면 그 근로자는 법이 보장한 것조차도 주장하지 못하는 노예인 것이다. 적어도 근로기준법은 근로조건을 정하는 데 있어서는 근로자는 노예가 아니라고, 자주적인 인간이라고 선언했다.



4. 근로자는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임금·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자”라고 정의한(제2조1호)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은 근로자가 노동조합을 설립해서 활동하면서 사용자를 상대로 단체교섭을 하고 파업 등 쟁의행위를 하는 데 대해서 규율하고 있는 법률이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기본권의 행사를 규율하고 있는 법률이다. 근로자가 사용자를 상대로 자신의 권리인 근로조건 유지·개선을 위해서 노동조합을 조직해 교섭과 투쟁하는 것이니 여기서 근로자는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요구, 쟁취해 나가는 자주적인 인간이다. 노조법은 특별히 노동조합에 사용자의 이익을 대표하여 행동하는 자의 참가를 허용하지 않고 이들이 참가한 노동조합은 더는 노동조합이 아니라고 하고(제2조4호 가목), 노동조합 경비의 주된 부분을 사용자로부터 원조받아도 노동조합이 아니라고 하고(동호 가목), 사용자가 노동조합의 조직 운영에 지배·개입하는 걸 부당노동행위로 금지하고 있다(제81조). 자주적이지 않으면 노동조합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자주성을 침해하는 사용자의 행위를 규제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근로자가 주체가 돼 자주적으로 단결해”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등을 도모할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라고 노조법은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제2조 제4호). 사용자로부터 자주적이지 아니한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이 아니라고 노조법은 명백히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노조법상 근로자는 스스로 노동조합을 조직해 사용자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위해 교섭과 투쟁하는 자주적인 인간이다.



5. 이상을 통해서 보면 이 나라에서 근로자는 사용자에 복종해서 일하는 걸 제외하고서는 자주적인 인간이다. 사용자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로 근로계약의 내용인 근로조건을 정하고, 그 근로조건의 유지 개선을 위해 근로자단체 노동조합을 조직해서 사용자에 맞서 요구해서 교섭과 투쟁하는 인간인 것이다. 어디에도 자주적이지 않은 근로자의 자리는 없다. 보호의 대상인 근로자로서 근로기준법에서든, 스스로 보호의 주체인 근로자로서 노조법에서든 자주적인 인간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이 나라 대한민국에선 자주적인 근로자를 찾기가 어렵다.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10%를 겨우 웃돌고, 노사협의회 등을 통해서 근로조건을 정하면서 노동조합을 비웃기 일쑤다. 심지어 사용자가 정해 주는 대로 받는데도 그 임금 등 조건을 내세우며 과시한다. 그렇다고 노동조합이 조직돼 있는 사업장이라고 당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를 자주적인 인간으로 세우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말할 만한 노동조합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근로자라고 규정한 법도 선언한 자주적인 인간, 그것은 아직 이 나라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