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

장례식장은 긴장감이 역력하다. 차가운 아스팔트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시민들 뒤편에서 이들과 함께 나눌 일용할 양식을 만드는 농민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누군가는 담배 연기 섞인 한숨을 멈추지 않고, 경찰이 배치된 정문쪽을 응시하는 눈빛에는 설명할 수 없는 원망의 감정이 담겨 있다. 9월25일 오후 백남기 농민이 영면하고 열흘 정도 흘렀다. 그의 삶에 집중하는 추모의 시간을 가질 겨를도 없이, 국가 권력의 시신탈취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은 당혹스럽다 못해 황망하다.

근대 국가는 폭력의 수단을 독점한다. 경찰·검찰·군대 등 법률이 그 존재를 인정하는 폭력의 수단을 독점하는 대신 사회구성원의 평안을 보장하라는 거대한 계약이다. 그만큼 큰 책임이 따른다. 정당한 직무집행 범위를 넘어서는 폭력 행사는 허용돼서는 안 되며, 정당한 직무집행 범위를 국가가 자의적으로 판단할 수도 없다. 국가 폭력은 민주주의 원리에 예속돼 시민들의 비판과 감시, 평가와 교정의 대상이 된다.

지난해 11월 시위군중과 경찰병력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없었던 소강 국면에서 무방비 상태의 개인을 향해 위력적인 수압이 가해졌다. 환자를 이송하던 응급차를 향해서도 살수가 이어지던 정황에서는 과실이나 오류를 넘어서는 고의성까지도 의심된다. 백남기 농민이 사망에 이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명확하다. 정부는 시민의 생명에 위해를 가한 공권력 집행이 이뤄진 경위를 명확히 밝히고, 유족과 시민들에게 무한한 사과와 책임을 표해야만 한다. 그러나 익숙하게도 현 정부는 이치에 맞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정부를 구성하는 행위자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공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동원하는 강제력을 공권력(公權力)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다. 민주국가의 원칙이 사라진 야생의 폭력이다. 나는 독점된 야생의 폭력, 시민의 세금으로 쌓아 올린 방패와 차량들이 ‘부검영장’이라는 사법부의 판단을 들고 장례식장을 에워싸는 모습에서 큰 공포를 느꼈다. 이 국가의 대통령과 강제력의 집행자들은 미안하다는 말, 잘못했다는 말,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 한마디가 어려워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기고 있는 것인가. 윤리가 사라지고 광기만 남은 대치 현장에서 사극에 나오는 봉건시대의 외마디가 욕설처럼 삐져나온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시위의 존재와 폭력의 남용을 분별하지 못하고 국가의 야생성을 비호하는 정당, 고인이 임종 시점에 안고 있던 질병이 사망의 원인이라 주장하는 주치의, 의사의 왜곡된 진단에 ‘안락사’라는 프레임을 덧씌워 확산하는 기자, 그리고 유족들을 살인죄로 고발한 ‘자유’라는 이름의 극우단체…. 규제받지 않기에 더욱 잔인해질 수 있는 사인(私人)들의 야만적 결사는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넘어서야 할 과제가 현직 대통령 한 사람에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여겨 온 일상과 역사의 축적은 우리를 병들게 했다.

버겁고 두렵지만 국가공동체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한, 시민성을 회복하기 위한 추모의 공간을 지켜 내야 한다.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말하고, 충분히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은 비단 서울대병원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고통에 반응하는 윤리, 폭력을 의심하는 지성이 발현될 수 있는, 우리가 서 있는 일상의 모든 공간이 치열한 싸움터다.



청년유니온 위원장 (cartney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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