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어제는 추분이었습니다. 봄의 춘분과 함께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날입니다. 뜨거운 낮의 계절인 여름이 비로소 끝나고 밤의 계절인 겨울의 문턱, 가을로 접어드는 날입니다. 조화와 중용의 날입니다.

가을은 오곡백과가 익어 가는 계절입니다. 추분 무렵 벌판에 서면 온통 황금물결입니다. 누렇게 익어 가는 벼가 가득한 논에 시원한 바람이라도 불면, 잘 익은 나락에서 풍기는 구수한 냄새가 온 누리에 가득합니다. 여름 내내 비바람을 견디고, 천둥번개를 이기며, 뜨거운 햇살을 받아 속을 알차게 가득 채운 벼의 내공이 은은하면서도 구수한 향기를 내뿜는 것이죠. 그래서 ‘아름다운 냄새’라는 뜻인 한자 향(香)이 벼(禾)+날(日)인 모양입니다. 진정한 향기란 꽃이나 꿀 등의 감각을 자극하는 호들갑이 아니라 여름 햇볕의 뜨거움을 안으로 간직하며 누렇게 익어 가는, 그래서 오히려 스스로의 결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고개를 숙인 벼들로 가득한 가을 들판의 내음입니다.

그리고 황금빛 가을 들판의 진정한 향기는 봄부터 뜨거운 여름 내내 그 들판에서 곡식을 가꾼 농부들의 땀방울의 냄새입니다. 백기완 선생님도 민중미학 특강을 하시면서, 들판에서 땀 흘려 일하며 곡식을 가꾸는 농사꾼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에 비친 가을 하늘빛이 가장 아름다운 빛깔이라며, 그 빛깔이 바로 ‘가노을빛’이라고 일갈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향내 가득한 황금벌판을 바라보며 한숨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농민들입니다. 무분별한 국가 간 자유무역협정 체결로 값싼 외국 농산물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오는 데다, 유전자변형 식품까지 겹치면서 우리나라 농업은 시장 경쟁력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렇다 보니 국내 생산량이 더욱 잘 조절돼야 하는데, 정부가 제 역할을 방기하는 사이에 풍작이어도 농민은 한숨짓고 흉작이면 소비자까지 우울한 세태가 돼 버렸습니다. 우리 농민의 주 생산품인 쌀은 이중곡가제 등 정부의 적절한 개입이 필요한데, 쌀 풍년인 올해도 이대로라면 쌀값을 두고 한판 싸움이 불가피할 것 같다는 농민들의 전망이 전 국민을 힘들게 합니다.

추분 즈음이면 국회도 정기국회를 열어 한 해 추수를 하지요. 각 정당이 대표연설을 통해 책임 있는 국정비전을 제시하고, 국정감사를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국정감사의 핵심은 증인채택과 질의응답인데, 여야가 당리당략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국민의 한탄 소리만 높아 가고 스트레스만 가중시키는 것 같습니다. 정치가 국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지 못하고 고충을 해결해 주지도 못하면 국민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노동자들이 그렇습니다.

헌법적 규정인 교섭에 의한 노사자율의 대원칙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법률을 어겨 가며 청와대 지시라고 밀어붙이는 성과연봉제에 맞서는 금융노조의 총파업을 필두로 산별노조의 총파업이 줄줄이 이어지고, 11월12일에는 전태일정신 계승 노동자대회가 민중총궐기로 이어진다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매년 가을 정기국회 개원과 함께 국회를 대상으로 벌어지는 노동자·민중의 투쟁은 이제 연중행사처럼 돼 버렸습니다. 왜곡된 언론의 횡포와 국민의 무관심 속에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반짝 빛났다 사라지는 별똥별처럼 외롭고 쓸쓸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아침저녁 창밖은 하루가 다르게 싸늘해지는데, 추위 탓인지 가을모기가 극성입니다. 촘촘한 방충망으로 창문과 틈을 막았는데도, 어디로 들어왔는지 불만 끄면 앵앵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듭니다. 테니스채 같은 전자 모기채가 개발돼 날아다니는 모기도 잡을 수 있게 만들었으나, 그것으로는 역부족입니다. 모기도 몸을 줄여서 방충망 좁은 사이나 작은 틈으로도 들어올 수 있게 진화한 것 같습니다.

생각해 봅니다. 이미 생겨서 방안까지 들어온 모기를 퇴치한다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아예 생기지 못하도록 서식지를 없애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다세대주택인 우리 건물 바로 옆에 하수구가 있고, 그 주변에 풀이 무성했습니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놈들부터 싹 베어 버리도록 하겠습니다.



전태일재단 이사장 (president1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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