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맞벌이도 아니고 아이들도 곧 입학할 나이가 되고 하니 많이 불안해졌습니다. 이번에 해결돼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버틸 힘이 없습니다. 이제는 남 생각 못할 것 같습니다. 추석 전에 꼭 해결되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항상 옆에 같이 있을 줄만 알았던 동지들이 한 명씩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와서 너무 아프고 허전합니다. 처자식 생계도 겨우 챙기는데 저에게 큰 힘이 돼 주셨던 아버지께서 간암으로 쓰러지셔서 생계가 막막합니다. 계속 이렇게 투쟁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됩니다.”

21일 기준 노숙농성 234일째다. 국회 앞으로 와 단식농성을 시작하면서 길 위에서 보낸 날이 벌써 23일째다. 케이블방송 티브로드 비정규 해고노동자들의 애끓는 심경을 들으며 노동자로 일하는 게 죄가 되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한탄한다. 악질 사용주를 향해 육두문자로 욕하는 것도 지쳤다. 장기간 농성에 삼보일배도 하고 한강대교에도 올라가고 단식도 연이어 해 봤지만 회사측은 타결할 듯 간만 보다가 말을 뒤집었다. 죽는 것 빼곤 다해 봤다는 숱한 간접고용 비정규 노동자들처럼 티브로드 해고노동자들도 기약 없는 싸움을 이어 가고 있다.

티브로드 노동자들이 굳이 민의의 전당인 국회 앞으로 온 건 이유가 있다. 2013년 원청까지 무릎 꿇린 강력한 투쟁으로 노사상생협약을 체결한 희망연대노조 케이블방송비정규직티브로드지부는 주목받았다. 노조 탄압으로 악명 높은 태광그룹 계열사인 티브로드에서 승리했을 뿐 아니라 이후 직접고용 정규직화를 향한 교두보를 마련했기 때문이었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의 힘으로 지부는 번듯한 노조 사무실도 가지게 됐고 사회공헌기금도 쟁취해 지역사회와 긴밀하게 소통하고 연대하는 새로운 노조운동의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후 티브로드 원청 사용주의 부당노동행위와 노조 탈퇴 공작, 조합원에 대한 선별 해고와 폐업에 시달리며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조합원수도 절반 이상이 탈퇴하거나 퇴사해 빠르게 줄었다. 하청업체 사용자들과 애써 맺은 임금·단체협약이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원청 사용주에 의해 휴지 조각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결국 티브로드 비정규 노동자들은 노사합의만으로는 정당한 노동 3권 보장이 불가능하다는 걸 절감했다. 몸통인 원청 사용주가 맘대로 노사합의마저 무력화시켜 버리니 진짜 사장이 책임지도록 하는 법·제도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가장 절박한 건 세 가지다. 첫째, 원청 사용주가 최소한 교섭에는 나오라는 것이다. 근로기준법이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사용자 지위가 인정되기 전에라도 노조가 만들어진 간접고용 비정규 사업장에선 노사교섭의 일방으로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둘째, 쟁의기간 중 원청의 대체인력 투입을 금지하라는 것이다. 합법파업 파괴 행위를 용인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 업체 변경시 기존의 고용과 근속, 단체협약을 그대로 승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합원이 가장 많은 지회를 대상으로 폐업해 51명의 대량 부당해고가 발생한 티브로드 사태처럼, 업체 폐업이 노조 탄압 수단으로 악용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노조를 만들어 투쟁해 본 간접고용 비정규 노동자들의 공통된 염원을 반영한 내용이다. 이 중 첫째와 셋째는 송옥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입법 발의했고 둘째는 세부 내용을 조율하며 법안을 준비 중이다.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이 극심한데도 정치가 실종됐다. 여소야대 국회도 민생 의제 앞에서 제 몫을 못하긴 마찬가지란 비판이 따갑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울분이 전국 도처에 넘쳐 우리 사회가 온통 몸살을 앓고 있다. 국회 앞에서 오늘도 하늘을 지붕 삼아 잠을 청해야 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은 국민이 맞나. 수천억원 배임·횡령으로 4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도 병보석으로 나와 활보하고 있는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은 뭔가. 유전무죄 무전유죄일 뿐인가.

티브로드 비정규 노동자들이 싸우는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그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다. 그들은 정규직으로 즉각 전환돼야 할 최적임자들인데도 노조 활동을 이유로 탄압받고 길거리로 쫓겨났다. 지금까지 꿋꿋하게 싸워 온 22명의 티브로드 노동자들이 복직되지 못한다면 헌법과 노조법은 그냥 폐기되는 게 맞다. 비정규 문제 개선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이든, 제1야당 출신의 정세균 국회의장이든, 여소야대 국회든 티브로드 비정규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본령 아닌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온몸으로 싸워 온 노동자들이 신뢰하는 정치는 언제쯤 실현될까. 티브로드 해고노동자의 눈물겨운 결의에 맘을 보탠다.

“노동자가 개처럼 일하다 노동조합에 가입해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게 사용자에게는 용납이 안 되는 일인가 봅니다. 그렇다고 다시 개처럼 일하기는 싫습니다. 끝까지 가 보려 합니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겁니다. 꼭 살아남을 겁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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