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나는 우리 주장과 실천이 알리바이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혁명주의든 개량주의든, 평등파든 자주파든, 국내파든 국제파든 진보 범주에 속한 누구도 의도하거나 공모하지 않았지만 진보의 총합은 알리바이 주장과 알리바이 실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10년 넘도록 진보의 행태와 실천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다. 하도 반복되니까 이젠 국민도 알아 버렸다.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정치(운동), 대중조직과 정파조직, 어찌 그리 한결같은지 모르겠다.

정치(운동) 단위를 보자. 진보가 분열돼 그렇다, 운동이 개량이라 그렇다, 우리가 소수라 그렇다, 하고 즐겨 변론한다. 좋다, 인정한다 치자. 그 다음은? 각자는 통합과 변혁과 다수를 목표로, 뭐 하나라도 감동 주고 있나? 노선의 진정성은 보여 주고 있나? 계급과 민중에게 진한 울림은 주나?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민주노총을 보자. 한상균 집행부 1년6개월은 민주노조운동 실력을 날것으로 다 보여 준 과정이었다. 이른바 좌파의 실력과 직선제 한상균의 진정성으로도 총파업을 세우지 못했다. 산별과 개량주의가 협조하지 않았다고? 지난해 7월 파업 무산 때 금속 핵심이 어떤 세력이었는지 아나. 그때는 단위노조 탓이라고? 그렇다면 민주노총에서 거의 조직하지 않았던 12월 파업 규모가 가장 큰 요인은 아나. 현대자동차 개량 집행부의 결단을 인정하나. 총궐기 위력시위를 되돌아볼까. 겨우 밧줄인데 당긴 인원이 13만명 중 몇 명이나 됐을까. 대놓고 호소하는데도 계백 장군 만큼의 5천 결사는커녕 5백명도 안 됐다. 맛 간 개량주의자인 나야 그렇다 치고, 청와대 진격을 주장하던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단위들은 왜 방관했을까. 그렇고 그런 선수끼리라도 거짓부렁 하지 말고 후과가 두려웠노라 서로 인정하면 덧나나. 활동가가 그 꼴인데 국민 일반과 별 차이 없는 조합원은 어떨까. 이미 민주노총은 총파업과 위력시위에서 좌파 결기와 한상균의 진정성으로도 과거 같은 방식으로는 도무지 조직할 수 없는 단계다. 조합원 처지가 변해서다. 새로운 의제와 방식으로 총파업을 조직해야 하는 것이다.

정파들을 보자. 대중조직이 활발할 때는 훈수만 놓아도 별 문제 없다. 그러나 대중조직으로 돌파되지 않을 때는 정파조직이 뚫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구속과 해고를 각오하고 판을 흔드는 실천에 앞장서야 한다. 그래야 대중이 감동하고 따른다. 선동하고 실천한다고? 솔직하게 까자. 내가 다치지 않을 만큼에서 세상 바꿀 정도는 아닌 주장과 실천? 10년 넘게 주야장천 그러고 있다. 그러는 사이 노동의 분단은 계급 해체 단계까지 치달았고, 운동은 쪼그라들었다. 나와 너, 우리의 용기는 감옥을 서로 떠넘길 정도로 비루한 처지로 전락했다. 그래도 내 정파의 신심과 올바름을 알아 주지 못하는 다른 정파 문제라고? 운동노선이 종교가 아닌 과학이라면, 그동안의 노선에 혹시 부족한 건 없는지, 남한자본주의 단계와 북조선 상태와 계급계층의 변화와 운동주체의 처지를 과학적으로 되짚어보면 안 될까. 10년 넘게 반복되는 우리의 행태가 운동과 세상 변화에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다면, 한 번쯤은 스스로 의심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시민운동과 교수와 언론 등 지식인 주축의 운동을 보자. '악' 소리도 못 내고 죽어가는 저 밑바닥의 절박함을 차가운 머리가 아닌 뜨거운 심장으로 읽었으면 좋겠다. 에구, 이렇게 말해 놓고 나니 미안하다. 내가 몸담고 있는 노동운동과 민중운동도 마찬가지다.

현재 한국 사회 삶의 상태를 가늠하는 자살률이 세계 3위다. 1위는 가이아나고, 2위는 북한이다. 현재와 미래 삶의 상태를 가늠하는 출산율은 세계 224개국 중 220위다. 청년은 일자리가 없고 노동자 절반은 비정규직인데, 30대 재벌 사내유보금은 754조원이다. 노동 분단도 심각해서 노동자 상위 10%와 하위 10%의 임금격차는 6배에 육박하고, 부동산과 연금 따위도 통계에 넣으면 삶의 격차는 10배가 넘는다.

밑바닥에서 폭동에 가까운 투쟁이 일어나야 하는데, 차분하다. 진보와 좌파를 표방하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세력이 나도 너도 앞다퉈 체제를 흔들고, 노동계급과 민중을 격동해야 하는데, 참 평온하다. 왜 그럴까.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첫째, 밑바닥을 대변하고 밑바닥인 듯 행세하는 진보가 부와 권력과 명예의 한 측면에서 체제 20% 안에 들었다. 세상을 뒤흔들어야 할 만큼 절박하지 않다. 둘째, 20%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실천한다. 대표 사례가 세월호 참사와 최저임금 실천에서의 우리 모습이다. 감옥이든 직장이든 내가 다치지 않을 만큼 대응한다. 셋째, 그게 오히려 밑바닥 저항을 적당한 단계에서 멈추도록 만든다. 압력솥 증기구멍 역할이다. 그게 없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새로운 흐름이 혁명책이든 개량책이든 획기적으로 추진할 텐데, 안 되네 하면서 체념하게 만든다.

총파업이든, 집회든, 입법이든 진보의 운동과 정치가 전개하는 실천은 과정과 결과가 어떨지 공식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 누가 어떻게 주장할지 답도 있다. 누구에게도 울림을 못 주는 빤한 주장, 빤한 과정, 빤한 결과다. 그래서 누구도 운동과 세상이 바뀔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운동과 정치에서 그런 실천과 주장이 필요할 때가 있다. 나와 우리는 밤잠 설쳐 가며 이렇게 노력했어, 평가서를 남길 때다. 쟤네들 때문이야, 변명거리를 남길 때다. 그러는 사이 운동과 세상은 끝 간 데 없이 망가지고 있다.

이게 계급과 민중과 민족과 역사 앞에 알리바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와 우리가 펼치고 있는 자랑스러운 운동이고 정치의 실재 아닌가. 그래도 상황 탓이고 다른 세력 탓이라고? 참 쉽게 운동하고 정치한다.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jshan8964@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