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희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사람)

고용노동부가 기금형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퇴직급여법) 개정안을 지난달 31일 입법예고했다. 2년 전 대규모 기업부터 단계적으로 단일기업형 기금 형태 도입을 추진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급진전이다. 노동계가 주장해 온 연합형 기금제도(산업·지역별로 다수 기업이 연합해 기금을 설립하는 형태) 도입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퇴직연금 도입 11년, 문제 투성이 제도

주 40시간제와 퇴직연금제도는 10여년 전 비슷한 시기에 입법절차를 마치고 시행됐다. 주 40시간제가 노동계의 주도적 역할과 정부의 기초고용질서 확립 노력에 힘입어 산업현장에서 상당히 안정적으로 정착한 반면, 퇴직연금제도는 퇴직연금의 실질적인 가입자이자 최종 수익자인 근로자를 대표하는 노동계의 주도적 역할이 미미한 실정으로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첫째, 퇴직연금사업자가 주도하는 퇴직연금 시장은 △가입 기업과 근로자에게 높은 수수료 부과 △위험 대비 낮은 수익률 보장 △수익자 중심 공시 부족 △가입자의 투자특성 진단 소홀과 고위험 권유 △자산운용의 투명성·도덕성에 대한 불신 △과소·불완전 적립 미검증과 근로자 수급권 약화 같은 폐해를 불러왔다.

둘째, 급속한 고령사회 진입과 장수위험(자산 없이 오래 살 위험) 증가가 현실화된 상황에서 노동계는 여전히 퇴직연금을 노사관계의 주요 의제로 다루지 않고 있다. 정부와 국회가 과세이연·세제혜택 등의 조치를 조금씩 늘려 왔지만 근로자 생애복지 강화 차원에서 이를 활용하려는 노동계 인식과 실천적 노력은 아직 미흡하다.

셋째, 이제까지의 퇴직연금 도입현황 통계는 사업장 규모가 작을수록, 고용이 불안정할수록, 소득이 낮을수록 퇴직연금 사각지대에 놓일 위험이 크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퇴직연금에서도 부익부빈익빈 현상은 심각하다.

기금형 제도, 시의적절한 해결책인가

정부는 ‘규모의 경제’ 효과를 꾀할 수 있는 기금형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노사의 참여 저조와 전문성 부족 등 퇴직연금사업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퇴직연금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또 근로자 수급권을 강화하고 중소기업의 퇴직연금 도입 유인을 높여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한편 원리금 보장 상품에 치우친 자산운용을 투자성 상품 중심으로 변화시켜 자산운용 수익률을 높일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기금형 퇴직연금제도가 이러한 정부의 기대에 부응하는 만병통치약이 될 수 있을까. 기금형 제도의 도입 취지와 달리 실행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첫째, 재벌기업을 비롯한 그룹사·지주사 계열사들이 기금형 제도에서 기업의식을 이용해 근로자 및 노동조합을 포섭한 상태에서 계열 금융기업에 기금 몰아주기와 관계사 채권·주식 편입비중 확대를 통한 기업지배구조 방어 수단에 활용할 경우 퇴직연금 수급자인 근로자의 이해관계를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전후 파산 위험을 불러일으킨 미국의 GM·크라이슬러 등의 퇴직연금기금 운용사례는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둘째, 기금형 제도가 내생적으로 안고 있는 대리인 문제(대리인이 주인의 이익보다 대리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문제)를 근로자와 노동조합이 제어할 수 있는가다. 내·외부 전문가들이 근로자들의 이익에 충실하지 않고 자신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금융기업들에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포섭’(capture)된다면, 퇴직연금사업자인 금융기업이 주도하는 퇴직연금 시장의 폐해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특히 이러한 위험성은 의사결정의 권리와 책임이 괴리될 경우 더욱 커질 수도 있다.

셋째, 기금형 제도가 대리인 문제로 말미암아 가입 기업들에게 더 높은 비용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 대리인 문제는 정부 관리감독 강화로 해소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기금형 수탁법인의 관리·운영 비용이 커진다면 차라리 현행 계약형 제도 중에서 표준형 제도(복수의 기업이 하나의 퇴직연금사업자와 표준규약 및 표준계약서에 따라 운영, 확정기여형만 허용)를 활용하는 편이 낫다. 이번 기회에 표준형 확정급여형(DB)도 허용해 제도 선택 폭과 자율성을 넓혀야 한다.

제도 아닌 노동계 실천이 해법

결국 앞서 살펴본 퇴직연금 도입 11년 동안 나타난 문제점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노동계가 어떻게 주도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을 경주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노동계가 진행하길 바라는 과제들을 말하고 싶다.

첫째, 산업별·지역별로 노동계가 주도하는 연합기금형 또는 표준계약형 퇴직연금을 설계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퇴직연금사업자에게 기업이 부담하는 운용관리수수료와 자산관리수수료, 퇴직연금 자산운용 상품에서 기업 또는 근로자가 부담하는 수수료를 합리적으로 낮출 수 있다. 또 △수익자 관점에서의 순수익률 △자산운용역의 성과 이력과 안정성 △위험 대비 수익률의 변동성 △자산 매매회전율 △포트폴리오가 운용계획서에 명시한 투자지침을 준수했는지 여부 등을 수익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공시할 수 있다. 수익자 중심의 지배구조와 일정한 규모를 갖춘 연합형·표준형 퇴직연금이라면 국가 경제와 자본시장의 건전한 발전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둘째, 노사관계에서 퇴직연금 세제혜택과 과세이연 효과를 활용해 근로자 생애복지를 강화할 수 있는 교섭의제를 발굴해야 한다. 현재 시중에서 가입할 수 있는 개인연금 상품보다 실질 수수료와 서비스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훨씬 만족할 만한 개인 자산운용과 노후설계를 개별 근로자들에게 제공하도록 도모해야 한다. 승진·승급·임금인상 누적분을 고려했을 때 DB형 대비 최종 수령금액이 적을 것을 우려해 근로자의 수급권이 보다 명확한 확정기여형(DC)으로의 전환이 망설여진다면, 단체교섭 총액 재원의 범위 내에서 이를 극복할 다양한 방법들을 창의적으로 개발할 수 있다.

셋째, 최종 수익자인 개별 근로자 관점에서 과소 적립과 불완전 적립을 검증할 수 있도록 하루빨리 급여명세서 지급 의무화 법안을 제정해야 한다. 퇴직연금사업자들은 과소·불완전 적립 여부를 심사·판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검증할 능력도 없고 책임도 지지 않는다. 계속근로기간 1년 미만의 근로자를 퇴직연금 가입대상에 포함하는 법안도 재추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넷째, 단위 노동조합과 근로자들에게 퇴직연금 관련 권리의식과 금융지식을 함양하기 위한 교육훈련을 강화해야 한다. 이는 최종 수익자인 근로자 관점에서 이뤄져야 하며, 결코 퇴직연금사업자 중심의 관점에서 이뤄져서는 안 된다. 지난 10여년 퇴직연금사업자가 시장을 주도하면서 잘못 알려진 상식들을 깰 수 있어야 한다.

양대 노총과 산별조직, 근로자 권익 위해 나서야

여러 문제점에도 정부와 퇴직연금사업자들이 우리 사회가 급속하게 고령사회에 진입하는 문턱에서 근로자들의 장수위험을 완화시키고자 기울여 온 노력은 존중받아야 한다. 이제는 노동계가 주도적으로 실천적인 프로그램을 갖추고 여러 문제점들을 개선하기 위해 나서야 할 때다. 양대 노총, 산별연맹, 산별노조를 비롯한 노동계가 퇴직연금의 실질적 가입자이자 최종 수익자인 근로자를 대표하는 주도적 역할을 시작하기를 기대한다. 더 이상 숨을 그늘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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