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진령 공인노무사(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2013년 처음 선전전을 나가던 날은 두려움과 흥분이 가득했다. 공단 노동자들을 만나서 우리의 이야기를 처음 전하는 것이었기에 혹 아파트형 공장 안에서 선전물을 돌리다 쫓겨나지는 않을까, 잘 받아 주기는 할까, 이런저런 걱정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복잡했던 마음 탓일까.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들고 나간 우리의 첫 선전물은 인쇄 오류로 ‘조쩔쉽’ 같은 알 수 없는 외계어가 군데군데 등장해서 읽는 이들을 몹시 당황하게 했고, 다음달 선전물을 들고 찾았을 때 그들은 ‘이상한 글자’를 언급하며 우리에게 농담을 던졌다.

‘반월시화공단 노동자 권리찾기 모임 월담’ 활동은 그렇게 엉뚱한 해프닝과 함께 시작됐다. 1년쯤 지나 선전전을 나가는 곳에서는 조금씩 낯익은 얼굴들이 생겨나고 월담이 조금은 노동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싶었던 그때, 마치 새로운 곳인 것처럼 노동자들이 싹 바뀌었다. 해가 바뀌자 노동자들도 바뀌었고, 그들은 다시 ‘이거 뭐에요?’ 하며 우리의 선전물을 낯설게 받아들었다. 지난 1년이 무색하게,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됐다. 다시 1년이 흐르자 이번에는 선전물을 돌리던 공단 식당의 절반이 텅텅 비었다. 그 많던 노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업체들이 문을 닫자 노동자들도 사라졌다. "노동조합 가입은 어떻게 하느냐"고 관심 있게 물었던 노동자의 얼굴도 보이지 않고, 늘 자전거를 타고 수고한다며 선전물을 나란히 받아 가던 두 명의 중년 노동자도 보이지 않는다.

대자본의 하청업체·부품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그래서 작은 사업장이 절대 다수인 공단. 노동조합이 거의 없고, 비정규직·파견노동자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이주노동자들도 많은 이곳. 불안정한 노동 현실은 그렇게 우리 눈앞에 다가왔다. 작은 시작을 만드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 보였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았다.

여러 실태조사 자료들을 통해 고용형태나 임금수준·노동시간·생활실태·인권침해 실태 등 다양한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지만, 실제로 활동을 통해 노동자들을 만난다는 것은 참 다른 일이다. 통계로 평면화된 것 가운데 하나하나를 개별로 쏙 뽑아내 입체적으로 재구성해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개별 노동자의 삶과 노동을 마주한다는 것이 내게는 그랬다.

어떤 노동자는 노동시간을 특정하지 않은 계약서를 갖고 있기도 했고, 어떤 노동자는 직업소개인지 파견인지도 알 수 없는 형태로 일한 사업장에서 산업재해를 당해 청력을 훼손당했고, 또 어떤 노동자는 파견회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경됐는데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너무 힘들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데, 사장이 온갖 협박을 해 와서 어떻게 그만둘 수 있는지를 묻는 노동자도 있었고, 체불임금이 1천만원을 넘어가는데 그만두면 못 받을까 봐 걱정하면서 본인 사업장 근처에 와서 퇴직금은 꼭 줘야 한다는 선전전을 해 달라는 노동자도 있었다.

미조직 노동자의 삶과 노동에 답을 주기에 아직 우리의 활동이나 법률은 미미하기 그지없다. 법적으로 답이 있을 때도 있지만, 없을 때가 더 많다. 공단의 작업장은 노동관계라는 체계적 형식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굴러가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노동자 임금을 빼먹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방법은 다종다기하게 존재해서, 싸워서 해결해야 하는 일들을 수없이 보지만 그냥 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이 더 많다.

그래서 손에 쥘 수 없는 물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밑 빠진 독에 어느새 조금씩 물이 채워져 이제 월담은 노동자들의 모임을 구성하려 시도하고, 조금 더 나아가 함께 싸우자는 이야기를 노동자들에게 건넨다. 그리고 이것은 월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월담보다 먼저 전국 곳곳에서 공단 조직화를 위해 활동을 전개하는 이들이 서울 남부에서, 인천에서, 경남 웅상공단에서, 부산 녹산공단에서 활동을 해 왔고, 안산지역에서도 지역 조직화를 위해 활동이 있어 왔다. 아직은 모두가 소진되는 활동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 꾸준한 시간이 언젠가는 공단지역에서 대규모 조직화를 이끌 날이 올 것이다. 공단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대자본에 맞선 투쟁을 조직할 수 있는 그런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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