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준상 전 KBS 이사

조선업 구조조정이 한창이다. 서울시에서는 오는 10월부터 지방공사 4곳, 출연기관 11곳을 대상으로 근로자이사제(노동이사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구조조정과 노동이사제는 겉으로 보기에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이다. 하지만 내게는 밀접히 연결돼 다가온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로 상징되는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 두 사건을 가로지른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미국 독립전쟁의 불씨를 지폈다고 평가되는 보스턴 차 사건은 의회에 대표가 없는 식민지에도 과세하기로 한 영국 왕국의 결정에 대해 북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이 저항하며 1773년 12월16일 보스턴 항구에서 벌인 일이다. 항의의 표시로 보스턴 항구에 정박한 영국 동인도회사의 배에 실려 있던 홍차 상자들을 바다에 버렸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구호는 거버넌스(지배구조)를 뜻한다. 발언권이 없음에도 세금을 징수당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항변이다. 좀 바꿔 보면 ‘권한 없이 책임 없다’는 말과 통한다. 그래서 조선업 구조조정에도 적용 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무런 발언권이나 권한도 없이 실업자로 내몰려야 하는 노동자는 이를 낳는 구조조정 과정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자본주의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경기순환을 감안하면, 구조조정은 한 기업이나 산업이 맞닥뜨려야 하는 숙명이다. 비유하자면, 머리 뒤에서 날아오는 돌이라는 얘기다. 정확한 수요 예측에 더해 행운이 겹치면서 앞에서 날아오는 돌은 여러 차례 피할 수도 있지만, 뒤에서 날아오는 돌은 뒤에 눈이 달려 있지 않는 한 피하기 어렵다. 불행하게도, 조선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논란이 됐듯이 앞에서 날아오는 돌들마저 손 놓고 있다가 죄다 뒤에서 날아오는 돌이 돼 버리고 말았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실업자수를 가급적 줄이는 게 노동조합으로서는 최대 현안이다. 최대한의 방어를 위해 평상시에는 별로 등장하지 않는 재벌개혁 구호가 등장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 비꼬아 보수적인 일부 매체들은 ‘잘 나갈 때면 분배를 받느라 가만히 있다가 어려워지면 재벌개혁 타령을 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건 비아냥거림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바라봐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잘 나갈 때는 몰랐던 게 못 나갈 때는 떠오르는 법이다. 회사 경영에 아무런 발언권도 없는 적나라한 현실은 못 나갈 때 드러난다는 얘기다.

서울시가 도입하려는 노동이사제에 대한 여러 가지 우려 목소리가 있다. 강성노조에 끌려다니게 돼 아예 구조조정이 불가능해진다거나, 신속한 의사결정을 방해한다거나, 유럽에서도 노동이사제를 줄이고 있다거나 하는 등의 반응이 그것이다.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경영에 대한 공동책임 의식의 중요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부작용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노동이사 도입을 통해 소모적인 노사갈등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으리라는 장점 역시 경영에 대한 공동책임 의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달성하기 어렵다. 노동조합과 노동이사는 위상과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이사는 ‘이사’인 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최대한 다해야 한다. 기업이 경제적으로 성공하되 이 과정에서 법률적이고 윤리적인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 윤리적인 책임에는 이윤의 일부를 희생해 정규직의 고용비율을 늘리거나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의 해소가 당연히 포함된다. 또한 사회와 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을 위해 이윤 일부를 자선적 책임을 다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이사가 도입된다고 해서 기업의 불법적인 행태가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배기가스 조작 파문이 불거진 독일 자동차회사 폭스바겐에도 감독이사회에 노동자 대표가 참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노동자 대표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작 사건은 발생했다.

한국사회에서 정작 노동이사제가 절실한 곳은 공공부문이라기보다는 민간부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상당한 실업이 불가피해지는 구조조정 시기는 거버넌스(지배구조)에 대한 문제제기가 쏟아져 나올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노동조합이다. 실업이라는 피를 어쩔 수 없이 흘러야 한다면 피의 대가는 획득하는 게 맞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라는 보스턴 티 파티 사건이 던져 주는 교훈이 아닐까 한다.

전 KBS 이사 (cjsang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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