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동희 공인노무사(노동법률원·법률사무소 새날)

대상판결 : 서울행정법원 2014구합61064 유족급여및장의비부지급처분취소

1. 사건의 개요


가. 들어가며

'손씻기'라는 일종의 의식(儀式)이 있다. 예전 한국철도공사 기관사들은 운행 중 부득이한 사상사고가 나면 직접 시신을 수습했다. 수습 이후에도 차량을 운행한 뒤 사고에 대한 경위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기관사들은 그릇에 소주를 부어 시신을 수습했던 손을 씻고 그날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술을 마셨는데, 이를 '손씻기'라고 불렀다. 이런 사건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나. 쟁송의 경위

이 사건은 2회의 사상사고 이후 약 9년이 지나 자살한 한 기관사이자 평범한 노동자의 자살사건에 대한 판결이다. 기관사는 2003년 자살하려고 선로에 들어온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치었고, 자살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절단됐다. 그리고 직접 시신을 수습한 이후 부산역까지 운행을 했다.

재해자는 2009년도부터 정신과에 내원했으며, 2012년 6월10일 자살했다. 유족은 이 사건 자살에 대해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청구했으나 불승인됐다. 심사청구 및 재심사청구도 모두 기각됐다. 이후 행정소송을 제기했는데, 서울행정법원은 고인의 자살을 업무상재해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서울행정법원 2016. 6. 17. 선고 2014구합61046 판결).

2. 대상판결의 요지

대상판결은 이 사건 자살이 업무상재해로 인정되는 판단의 근거로 크게 9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즉 ① 철도기관사 자체의 직무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 긴장과 압박감의 인정 ② 2001년도 사상사고 및 2013년도 자살자에 대한 시신수습 및 이로 인한 정신적 충격의 사실 ③ 전보된 승무사무소에서의 업무 스트레스 및 1인 승무에 따른 고객에 대한 스트레스 ④ 기관사 업무 부담으로 인한 보직을 변경한 사실 ⑤ 사상사고 이전 정신병력 전력이 없는 점 ⑥ 정신과 치료시 업무와 관련한 스트레스 호소 기재 사실 ⑦ 감정의의 일부 긍정적 소견 ⑧ 망인의 정신질환은 우울증 및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로 평가되고 정신질환은 생물학적 원인과 정신사회적 원인이 함께 작용해 발병에 기여하는 점 ⑨ 망인이 평범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왔고, 다른 지병을 앓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망인에게 앞서 본 바와 같은 업무상 스트레스를 제외하고 자살을 선택할 동기나 계기가 될 수 있을 만한 사유가 나타나지 않고, 2012년 4월30일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아 왔던 점 등을 판결 이유로 제시하고 있다.

3. 대상판결의 시사점

가. 기존 1심 법원의 판결과는 다른 판단 기준으로 판결했다는 점이다.

2015년도 상반기 대법원은 자살이 산재가 아니라고 판결했던 1심 법원의 5개 판결에 대해 이를 모두 파기하는 판결을 했다(대법원 2015. 1. 15. 선고 2013두23461 판결, 대법원 2015. 1. 15. 선고 2013두7230 판결, 대법원 2015. 1. 29. 선고 2013두16760 판결, 대법원 2015. 5. 28. 선고 2013두21328 판결, 2015. 6. 11. 선고 2011두32898 판결). 그래서 대법원보다 1심 서울행정법원에서 자살이 산재로 인정되는 경우는 어렵다고 평가됐다. 서울행정법원이 과도한 사회평균인 기준을 적용해 판결을 했기 때문이다.

즉 서울행정법원은 “그 자살이 사회평균인의 입장에서 보아 도저히 감수하거나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업무상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우울증에 기인한 것이 아닌 한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대법원 2008. 3. 13. 선고 2007두2029 판결, 대법원 2012. 3. 15. 선고 2011두24644 판결)라는 입장에서 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대상판결은 판단의 전제로 두 개의 대법원 판결(대법원 2014. 11. 13. 선고 2012두17070 판결, 대법원 2015. 1. 29. 선고 2013두 16760 판결)을 제시하고 있다. 두 대법원 판결의 공통점은 사회평균인 기준이라기보다는 당해 재해근로자 본인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다. 다시 말해 판결에서도 “업무와 재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의 유무는 보통 평균인이 아니라 당해 근로자의 건강과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여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확립된 판례”라고 했다(대법원 1991. 9. 10. 선고 91누5433 판결, 대법원 2005. 11. 10. 선고 2005두8009 판결 참조). 결국 대상판결은 기존 하급심의 주류적 입장과 달리 업무상 자살에 있어 사회평균인 기준이 아니라 당해 근로자 본인 기준이라는 관점에서 판단을 한 것이다.

나. 대상판결은 적극적 심리를 통해 자살사건의 상당인과관계를 판정하고 있으며, 자살의 인정기준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자살사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그 발병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정신질환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생물학적 원인(유전적 원인)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다른 중요한 원인인 정신역동적 원인(사회적 스트레스 원인)은 산재 사건에 있어 저평가되고 있다.

기존 자살의 상당인과관계를 부정한 하급심 판결을 보면 “업무적 스트레스에 대한 평가, 우울증 발생원인, 경과, 의학적 소견 및 감정회신, 우울증 증세의 악화 및 이로 인한 자살과정 및 경위” 등에 대한 심리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 이 사건 대상판결은 기관사의 업무특성 및 기존 연구 결과뿐만 아니라 실제 사상사고의 내역, 사고 이후 재해자의 증상, 업무적 스트레스 내역, 의무기록지 내역 등을 세심하게 심리했다.

즉 대상판결은 한국철도공사의 휴먼에러연구위원회 연구보고서 내용을 증거로 채택했으며, 재해자의 업무내용에서의 스트레스와 2회의 사상사고 및 2회의 운행사고, 업무 전보조치 이후 상황, 구로승무사업소에서 전동차 운행시의 스트레스 내역, 보조기관사로 운행 상황시 스트레스 내역 등을 구체적 심리를 통해 인정했다. 또한 의무기록지상 수회 업무적 스트레스 내역이 반복적으로 기재된 사실 등을 인정했다.

무엇보다 대상판결은 “망인이 평범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왔고, 다른 지병을 앓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망인에게 앞서 본 바와 같은 업무상 스트레스를 제외하고 자살을 선택할 동기나 계기가 될 수 있을 만한 사유가 나타나지 않는다”라는 점을 설시하고 있다. 기존 판결에서도 볼 수 없었던 자살사건 일응의 인정기준을 적극적으로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 대상판결은 공단의 자살사건 판단의 기준(지침 및 심의 과정)의 오류를 바로잡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정신질환 및 자살사건에 대한 판정지침으로 ‘정신질병 업무관련성 지침’(제2016-11호, 2016.3.28.)을 운영하고 있다. 지침은 특히 최초 증상 발생 전 6개월의 주요 변화요인, 일상적 업무상 스트레스 요인’을 우선적으로 조사하고 반영하고 있다.

당해 사건과 같이 장기간 오랫동안 지속된 증상발현 및 정신질환과 이로 인한 자살사건은 지침을 충족하기 어렵다. 특히 재해자는 외상사건이 발생하고 6년 뒤 정신질환으로 내원했고, 우울증 이외 정신분열증, 양극성 정동장애 등을 시사하는 소견을 보이고 있어 전형적인 공단 인정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문의사 및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은 재해자가 장기간 오랫동안 정신병적 상태가 지속됐다는 이유로 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자살사건에서 정신질환 유무가 중요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자살과 업무와의 인과관계는 의학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현행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는 자살을 포함한 정신질환을 별도로 심의하고 있고, 그 주된 판단의 주체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다. 의사에게 있어 “자살 산재사건이 규범적 판단의 영역이며,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돼야 하는 것이 아니며 규범적 관점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에는 그 증명이 있다고 봐야 한다”는 법원 기준(대법원 2014.11.13. 선고 2012두17070 판결)이 통용되고 있지 않는 점은 큰 문제다. 결국 판정위원회에서는 엄격한 의학적 기준이 적용되고 있고, 이는 자살문제를 포함한 직업병 문제를 ‘의학적 판단의 영역으로 축소 또는 회귀’시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자살사건에 있어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자살자의 질병 내지 후유증상의 정도, 그 질병의 일반적 증상, 요양기간, 회복가능성 유무, 연령, 신체적·심리적 상황, 자살자를 에워싸고 있는 주위상황, 자살에 이르게 된 경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대법원 1993. 12. 14. 선고 93누9392 판결, 대법원 2011. 6. 9. 선고 2011두3944 판결 참조)는 점을 참조하면, 현행 판정위원회 심의구조가 이러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라. 소결

앞선 질문에 답하자면, 외상사고 이후 증세는 30년이 지나도 나타날 수 있다(최신정신의학 제6판, 일조각, P. 395 참조). 이 사건에 있어 안타까웠던 점은 재해자 또한 동료가 운행하던 1호선 전동차에 투신해 사망했다는 점이다. 하루 39.5명이 자살하는 이 나라에서 노동자 자살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대상판결은 한 평범했던 가장으로 살아왔던 노동자의 자살을 어떻게 보고 평가해야 하는지 지적하고 있다. 업무상 스트레스를 제외하고 자살을 선택할 동기나 계기가 될 수 있을 만한 사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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