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나는 한때 회의주의자였습니다.

1983년, 그러니까 내가 교사 노릇을 시작한 지 10년째. 서울 신일고등학교에 근무하면서 학교교육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하다가, 서울 YMCA 교사회에 가입해서 교육운동을 시작하며, 내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광주 민중항쟁 이후 제기됐던, 우리 사회 민주화에 대한 교사로서의 구체적 실천이 과제였습니다. 대학을 건성으로 다니고, 학생운동에도 조직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모든 것이 모호하고 생소하기까지 했습니다. 공부가 많이 부족해서 모든 일이 혼란스러웠던 거지요. 나보다 나이는 적었지만 운동 선배가 소개해 주는 책을 읽고 얘기도 나눠 봤지만,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의(모임)를 자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내가 결정하고 다짐한 일에 대해서는 성실하게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회의에는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빠지거나 늦거나 중간에 나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회의 중 토론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결정에는 신중했으며, 민주적 절차에 따라 결정된 내용에 대해서는 원래의 내 의견과 상관없이 성실히 따랐습니다. 그런 나를 보고 동료(동지)들은 나를 회의주의자라고 불렀습니다. 약간의 비아냥거림도 섞여 있었지만, 그렇게 불리는 게 싫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회의주의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회주의자가 됐습니다.

회의(모임)에도 성실하고, 결정 사항을 실천하는 일에도 앞장섰던 나는, 함께하는 분들의 인정을 받게 됐나 봅니다. 그리고 내가 늦게 운동판에 뛰어들었기에, 나이도 좀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형식상 임원 역할을 많이 맡게 됐지요. 지부장·사무처(총)장·부위원장·위원장, 뭐 이런 게 주로 내가 담당했던 일들입니다. 이런 역할이 주로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회의나 집회의 사회를 보는 일입니다. 나는 국어교사였기에 회의는 가르치기도 했던 내용이라 자신이 있었습니다. 안건 설명을 명확하고 성실히 하게 하고, 논점을 분명히 한 뒤, 의견을 골고루 충분히 발표하게 하고, 쟁점이 생기면 쟁점 중심으로 찬반 토론을 균형 있게 하게 하고, 결정 방법을 정하고, 그에 따라 결정하면 웬만한 안건은 큰 무리 없이 처리되곤 했었지요. 교육운동 초기 노동조합인 전교조로 바로 가느냐, 임의단체인 전교협으로 좀 더 조직을 확대하느냐를 두고 의견이 팽팽하게 갈려 며칠 밤을 새는 회의를 하곤 했지요. 그런데 어렵게 전교조로 가자고 결정을 했을 때, 오히려 반대했던 지역에서 전교조 결성에 더 열심히 나서 줬고, 같이 해직을 당하며 고난의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그래서 전교조가 힘 있게 건설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고맙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또 내가 국민연합 집행위원장 역할을 할 때도, 민자당 일당 독재 분쇄와 민중기본권 쟁취를 위해, 당시 남한 사회 모든 정파의 운동단체와 야당까지 참여했기에, 그 회의가 여간 복잡하고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상임의장인 한상렬 목사님이 사회를 보는데, 번번이 중간에 꼬여서 회의가 길을 잃곤 했지요. 그때마다 의장님은 상임집행위원장인 나에게 정리를 부탁했고, 그에 대비해 회의에 집중하며 가닥을 잡고 있던 나는 짧고 분명하게 정리함으로써 회의가 원활하게 진행되곤 했었지요. 그때부터 누군가 나보고 그랬어요. 당신은 정파가 무엇인지는 헷갈리지만 사회를 잘 보니, 사회주의자인 것만은 확실하다고요. 처음엔 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생각할수록 그 내용의 뜻이 깊어, 기꺼이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회주의자였습니다.

요즘 나라 꼴과 민중의 삶을 보면, 탄식이 절로 납니다. 드디어 99% 민중이 개·돼지라는 얘기까지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막장드라마입니다. 이런 자본주의를 혁파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룬 인간 품성이 살아 숨 쉬는, 원래 사회주의로 돌아가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힘을 모아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나는 더 확실한 사회주의자가 되려고 합니다.

전태일재단 이사장 (president1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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