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5년 만에 임신했다는 간호사 A씨.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그는 그토록 기다리던 아이가 생겼는데도 주변에 알리지 못했다. 병원이 시행하는 임신순번제 때문이다. 임신순번제는 말 그대로 임신할 차례를 정해 순번에 맞게 아이를 갖는다는 뜻이다.

임신순번제에 맞추려고 피임도 했는데, 생명을 어디 부모 뜻대로 만들었다 미뤘다 할 수 있나. 임신순번제를 어기는 노동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A씨는 “임신을 오래 기다린 만큼 축복받고 싶었는데 눈치가 보여 임신 사실과 입덧까지 숨겼다”고 귀띔했다. 그는 "항암제를 만지는 게 조심스럽고 불안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다"며 “우리나라 간호사들은 임신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임신한 사실 숨겼다"

황당하고도 비인간적인 얘기지만 간호사들 세계에서는 꽤나 잦은 일이다. 보건의료노조가 병원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를 대상으로 모성보호 실태를 조사한 결과를 5일 발표했는데 무려 8.4%가 "임신순번제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조사대상은 결혼한 20~30대 여성 병원노동자 3천996명이다. 원치 않은 피임을 했다는 노동자는 3.8%였고, 유산을 했다는 노동자도 2.9%나 됐다.

병원에는 왜 임신순번제 같은 황당한 제도가 있을까. A씨는 "임신을 하게 되면 야간근무를 못하게 되니까 동료들에게 미안하고, 한정된 인력 탓에 육아휴직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병원 근무는 데이·이브닝·나이트 3교대로 이뤄진다.

그런데 근로기준법은 임신한 여성노동자의 야간·휴일근로를 금지하고 있다. 빈틈없는 스케줄에서 한두 명이 임신이나 육아휴직으로 빠지면 남아 있는 노동자들이 메워야 한다. 윤은정 노조 정책국장은 "대부분 병원에서 임신하는 경우 업무에 차질이 생길까 봐 임신순번제를 하거나 눈치를 준다"고 말했다.

육아휴직 사용 실태도 엉망이다. 노조 실태조사에 따르면 병원에서 근무하는 기혼 여성노동자 10명 중 6명은 임신 당시 육아휴직을 사용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병원 사업장은 여성노동자 비율이 80% 이상인 데다, 상당수 여성노동자가 가임기 여성이다.

노조는 육아휴직 대상자 6천474명을 조사했는데, 육아휴직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응답한 노동자가 58.7%(3천798명)나 됐다. 공공병원 노동자의 53.8%, 민간병원 노동자의 61.2%가 육아휴직을 못 썼다. 육아휴직을 쓰지 못한 이유로는 "동료에 불편을 끼칠 수 없어서"(20.7%) 혹은 "분위기상 신청할 수 없어서"(23.8%)라고 답했다.

병원인력이 충분했더라면 육아휴직을 쓰지 못한 노동자 3천798명의 절반 정도는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모성정원제 도입해야”

노조는 병원이 육아휴직으로 생기는 결원을 고려해 정원보다 많은 인력을 보유하는 모성정원제 도입을 요구했다. 노조가 지난해 병원 육아휴직 사용 현황을 조사했더니 병원마다 한 해 동안 육아휴직 사용자가 100명이 넘는 것으로 확인됐다. 육아휴직으로 인한 결원은 대형병원의 경우 최소 50명에서 최대 180명으로 조사됐다.

병원측은 인력을 충원하지 않거나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을 한시적으로 사용한다. 노조는 “중앙행정기관의 경우 육아휴직으로 부족한 인력을 모두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모성정원제를 실시하고 있다”며 “병원에서도 결원인력을 공석으로 두거나 비정규직으로 사용하지 않고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모성정원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조는 자유롭게 임신하고 출산할 수 있는 근무환경을 만들기 위해 △모성정원제 도입 △보육지원시설 의무 설치 △여성노동자 건강권 확보를 요구하는 활동에 주력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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