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준상 전 KBS 이사

예상을 깨고 영국이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을 탈퇴하기로 결정한 이후 혼돈이 계속되고 있다. 탈퇴 원인으로는 독일로 상징되는 유럽연합 안 빈부격차, 시리아 난민으로 상징되는 난민 문제, 대처 이후 금융자본 중심의 산업 변화에 따른 영국 실물경제 위축 등이 꼽힌다. 연쇄 탈퇴의 신호탄이 될 것이고, 세계적으로 고립주의 물결이 휩쓸 것이라는 전망이 등장한다.

민주적 절차를 통한 정치적 사건인데도, 쏟아지는 관심은 비상할 정도로 높다. 세계경제 침체 상황에서 미국 월스트리트와 함께 글로벌 금융 중심지의 하나인 ‘시티 오브 런던’을 때린 정치적 사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브렉시트는 서방 선진국의 핵심 안에서 세계화와 무역을 통한 번영을 약속하는 기존 글로벌 경제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표출된 정치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세계적인 헤지펀드 운영자인 조지 소로스가 이미 증권을 버리고 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는 발 빠른 분석은, 브렉시트의 파장이 단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을 뒷받침한다. 또한 미국·일본·중국 등 통화당국이 경쟁적인 평가절하 정책에 나설 가능성은 1930년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종합하면 글로벌 금융자본이 가장 싫어하는 불확실성의 시기가 활짝 열렸다는 것이다. 이 불확실성의 시기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이며 그 결말이 무엇일지는 예측하기 어렵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다.

기존 경제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대안은 ‘기존의 세계화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글로벌화’가 꼽힌다. 그 내용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는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때 부상했던 국제금융체제 개편논의에 그나마 탄력이 붙으며 극히 일부분의 수정이 이뤄졌던 때가 2008년 리먼 브러더스 파산 이후 벌어졌던 글로벌 금융위기 때였던 것을 보면, 지리한 논의만 무성할 위험성도 큰 편이다.

대충의 방향은 ‘사다리 걷어차기’가 아닌 ‘사다리의 유연한 허용’과 자본이동 제한을 포함하는 산업과 무역정책을 동반하는, 세계화와 통합이 아닐까 한다.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가 내놓은 “브렉시트는 유럽연합, 런던의 뱅커(은행), 이민의 증가라는 기존 질서에 성난 영국의 투표자들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글로벌화가 필요하다는 신호를 보내는 분수령”이라는 분석은 타당하다. 지난해 슬라보예 지젝이 "난민의 수용이나 거부 모두 나쁘다"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며 자급자족 토대를 뿌리부터 붕괴시키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으로 꼽은 것과 비슷하다. 자기비판과 상호비판에 입각한 연대를 통해 새로운 계급투쟁을 벌일 것을 제안했다. (가난이 존재할 수 없는 기반 위에 사회를 재건하는) 새로운 계급투쟁, 그것이 성공할지 못할지는 자신도 모르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패배는 자명하다는 말과 함께.

브렉시트는 지젝이 말하는 새로운 계급투쟁의 장이 활짝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간과 공간에서 시장 근본주의 요소와 민족주의·인종주의 요소를 기회주의적으로 버무리며 생존하고 성장해 왔던 기존 우파 포퓰리즘이 가장 큰 혜택을 볼 위험성은 현재로서는 매우 높다. 기존의 지배적인 우파나 좌파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시간과 공간에서 한국은 방관자로 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아 보인다. 대북정책 측면에서 핵무장 동결을 조건으로 시리아 같은 난민 문제 발생을 예방하는 데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것도 그중 하나일 수 있다. 지젝이 말하는 자급자족의 토대는 한 나라 안에서도 여전히 많이 있다. 500만명이 넘는 중소상공인의 영역도 그런 토대에 해당한다. 이 영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기반을 제대로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 한국의 정부개발원조(ODA) 성격을 자급자족 토대를 강화시키는 쪽으로 내용을 채우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역사적 사건을 인용하며 마무리해 보자. 1806년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과 함께 한없이 치솟던 영국의 곡물가격은 승전 이후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지주는 1815년 일정한 가격 이하의 곡물 수입을 금지하는 곡물법을 제정한다. 1817년 데이비드 리카도는 비교우위론을 내세웠고, 이는 30년 뒤 곡물법 폐지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대개 여기서 그치기 마련이다. 브렉시트는 그 이면에 물음을 제기하라는 정치적 사건이다. 영국에 곡물을 수출하는 나라들에서는 곡물 수출 경쟁으로 곡물이 과잉생산되고 자연에 대한 훼손이 심각해졌을 위험성이 높다. 곡물가격 하락에 따라 영국에 대한 이들 나라의 교역조건이 악화했을 가능성 역시 엄존한다. 브렉시트는 그것까지 포괄하는 시스템이 필요함을 말해 준다. 게다가 리카도의 비교우위 이론은 자본이동의 자유는 없고 노동이동의 자유만 있다는 가정에서 가능했던 이데올로기였다. 현실은 정반대다. 자본이동은 사실상 무제한인데, 노동이동의 자유는 있으나 극히 제한돼 있다. 대규모 이동이 일어나는 것은 난민 사태 등과 같이 예외적이다. 대규모 노동이동 발생에 따른 파장과 부작용이 엄청나다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고 그런 상황에 대해 강력한 국경통제 정책을 사용한다. 크고 작은 자본이동은 일상이며, 대규모 자본이동도 심심찮게 발생하는데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못하는 자본이동의 자유와는 극히 대조적인 것이다.

전 KBS 이사 (cjsang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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