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의 칼럼니스트 겸 작가

내 고향도 아닌데 마치 내 고향인 양 그리워라 하는 곳이 있다. 짙푸른 바다를 품고 있는 도시, 동해. 아마도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가 만든 곡 ‘내 고향 동해바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 고향 바다에는 고기도 많지/ 아주 예쁜 물고기/ 내 고향 바닷물은 깊기도 하지/ 너무너무 파랗지/ 언제나 돌아갈까 내 고향/ 언제나 찾아가나 내 고향 동해바다….”

화가를 꿈꿨고 또 시인을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 생각했지만 가난 때문에 예술가의 꿈을 포기하고 대신 세속의 가수가 돼 노래로 서정시와 풍경화를 실어 나르던 남자의 고향. 그의 성장기를 수놓은 그 많은 불우와 상처들이 거의 모든 곡에 배어 있지만 결국 환하게 웃게 만드는 건 그의 고향 동해바다 때문일까. 아니면 무엇으로도 오염될 수 없었던 그의 영혼 때문일까 여러 번 생각했더랬다.

그곳, 동해바다에 갔다. 동해의 중심은 예나 지금이나 묵호항이기에 묵호항을 향해 차를 몰았다. 바다의 푸른색이 짙어 마치 검은색처럼 보인다 해서 ‘먹 묵(墨)’에 ‘호수 호(湖)’자를 이름으로 삼은 곳. 짙푸른 바다는 여전했다. 평일 오전 항구는 한가롭기 짝이 없고…. 그런데 뭔가 변해 있었다. 일찌감치 관광도시가 된 속초와 강릉에 비한다면 묵호항을 중심으로 한 동해는 누추한 쪽에 가까웠다. 특히나 묵호항에서 등대까지 이어지는 비탈진 언덕길의 산동네 풍경이 그러했는데, 그곳이 최근 젊은 예술창작집단의 벽화와 함께 너무도 산뜻하게 바뀌어 있었다.

사실상 벽화마을은 내가 그다지 선호하는 여행지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벽화마을이 생겨났는지 이젠 식상한 느낌마저 든다. 가난을 포장해서 파는 ‘벽화 공해’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다. 그저 알록달록 예쁠 뿐 실제 그곳에 사는 원주민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벽화를 보며 불편해하는 건 나뿐만이 아닐 거다.

그런데 이곳 묵호의 등대마을 벽화는 뭔가 달랐다. 이른바 ‘포토존’이라고 불리는 곳에 그려진 ‘천사 날개 그림’ 하고는 접근 방식이 다르다고 할까. 먼저 그림을 그리기보다 찾아가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젊고 참신한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재탄생한 느낌이다. 한때 지나가던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닐 정도로 호황을 누렸으나 1980년대 이후 어획량이 줄어들며 급격하게 쇠락한 조그만 항구 마을의 이야기와 애환이 담겨 있기에 원주민들이 나서 ‘우리들의 지역문화 유산’으로서 사랑할 수 있는 벽화 말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무슨무슨 벽화마을이라는 명칭을 거절한다. 다른 곳과 차이를 두고 싶은지 아예 ‘벽화’라는 말 대신 ‘담화’라는 단어를 쓰고 담화가 그려진 길을 ‘논골담길’이라고 부른다. 무슨 사연이 있지 싶다.

담화를 보고 알았다. 논골이라는 지명이 어디서 왔는지…. 41년 묵호항이 열리고 험한 뱃일이나 모진 허드렛일을 마다치 않는 사람들이 항구 가까운 비탈진 언덕배기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사내들은 배를 타고 나가고 아낙들은 묵호항으로 들어온 오징어와 명태를 지게나 빨간 고무대야에 담아 덕장으로 날랐다. 언덕 꼭대기 덕장으로 오르는 길은 ‘논’처럼 늘 질퍽해서 "마누라·남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고 했을 정도다. ‘논골’이란 이름도 거기에서 유래했다.

그림보다 그러한 삶의 이야기가 중요한 마을을 둘러보는 일이 참 좋았다. 무엇보다 미로처럼 좁다란 골목 어디에서나 바다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전망데크 ‘바람의 언덕’에서 보는 바다도 좋지만 가장 좋은 건 역시 언덕진 마을 정상에 놓인 묵호등대에서 보는 바다다. 그 아래 죽이는 풍광을 품고 있는 카페나 숙소도 있고 마을 공동 소득시설로 만든 레스토랑이나 상점·게스트하우스도 있으니 잠깐 머물며 쉬어 가기에도 그만이다. 충분히 쉬었다면 묵호항 어시장에서 회를 뜨자. 인근 해역에서 동네 어부들이 잡은 물고기 맛을 놓칠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이야말로 그림이나 음악·예술을 뛰어넘는 최고의 선물일 테니까. 평생을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은 어부와 항구 아주머니들의 날렵한 칼질 솜씨로 빚어내는….

칼럼니스트 겸 작가 (@kimkyung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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