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설노조
▲ 건설노조 광주전남전기원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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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활선공법은 원칙적으로 폐지하겠다."

전격적이었다. 한국전력은 지난 10일 "전기공사 현장에서 작업자의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현재 시행하고 있는 직접활선공법을 보다 더 안전한 방법으로 개선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직접활선공법 폐지를 요구했던 노동계뿐만 아니라 전문가들도 놀랐다. 무려 15년 동안 노동자들이 죽어 나갈 때마다 얘기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한전의 반전에 당황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건설노조 관계자는 "한전 발표 전 직접활선공법 폐지와 관련해 어떤 언질도 받은 게 없었다"고 말했다.

한전, 비용·민원 핑계로 안전요구 모르쇠

한전이 중단하겠다는 '직접활선공법'은 '전선이선공법'을 뜻한다. 전기를 흐르게 둔 채 교체할 노후전선을 잘라 내고, 새로운 전선을 연결하는 공법이다. 한전은 2001년 국내 한 업체가 개발한 전선이선공법을 '전력신기술 10호'로 인증하고 초창기 시범사업을 거쳐 2004년부터 거의 모든 배선활선공사에 이 공법을 적용하도록 했다. 작업시간이 짧고, 정전구간이 없으며, 장비·인건비가 적게 드는 신기술이었다.

지난 2014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한전이 당시 전정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에게 제출한 직접활선공법과 간접활선공법의 공사원가 비교표를 보면 이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직접활선공법으로 시공하면 간접활선공법보다 18~20%의 공사비용이 절감됐다. 인건비 절감이 가장 컸다. 간접활선공법에서는 공사당 6~7명의 인력이 필요하지만, 직접활선공법으로 시공하면 4명만 있으면 된다. 31%가량의 인건비가 절감되는 셈이다.

문제는 활선, 즉 전기가 흐르는 전선을 직접 제거했다 이어 붙였다 하는 작업이다 보니 감전사고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기안전공사 자료에 따르면 2009~2014년 송·배전공사 감전사고로 18명이 사망하고, 159명이 부상을 입었다.

물론 "원칙적 폐지"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한전은 당장 모든 배전공사에 직접활선공법을 중단할 계획은 없었다. 한전은 "활선에 직접 접촉하지 않는 바이패스케이블공법을 가능한 최대로 활용하고, 장비 설치가 불가능한 지역 등 불가피한 경우에만 직접활선작업을 시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바이패스케이블공법은 지상에 작업구간 전기를 우회시키는 전선(바이패스케이블)을 설치한 뒤 교체할 전선을 잘라 내는 공법이다. 작업구간에는 전기가 흐르지 않아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한전은 이후 각 지역본부와 협력업체에 '우선 바이패스케이블공법을 사용하고, 가급적 전선이선공법은 사용하지 말라'는 공문을 내려보냈다. 그런데 바이패스케이블공법으로 시공할 수 있는 협력업체가 극히 드물었다. 한전에 따르면 협력업체 455곳 가운데 바이패스케이블 장비를 등록한 업체가 30%(166곳) 수준에 불과했다. 이날 발표는 그야말로 '일단 지르고 보자'는 선언이었던 셈이다.

활선작업 폐지 발표 이틀 만에 사고

한전의 태도가 180도 바뀐 건 발표 이틀 뒤였다. 이달 12일 오전 10시30분께 광주 북구 문흥지구 고가 입구에서 전선이선공법으로 노후전선 교체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감전돼 오른팔과 얼굴에 화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직접활선공법 폐지 발표 이틀 만에 감전사고가 나면서 '가급적 전선이선공법을 사용하지 말라'는 권고만 한 한전의 진정성이 의심받기 시작했다. 여론은 들끓었다.

사고 당일 밤 10시께 한전은 부랴부랴 각 지역본부와 협력업체에 "전선이선공법 잠정 중단"을 지시했다. 한전 광주전남지역본부 관계자는 하태훈 건설노조 광주전남전기원지부장의 전남 화순 집까지 찾아와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한전은 14일 배전운영처 관계자와 전국 배전운영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배전공사 무정전공법 적용기준 개선회의'를 열고 전선이선공법을 전면 폐지하기로 했다. 또 모든 활선·무정전 공사를 감리대상 공사에 포함시켜 현장의 안전관리와 감독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매일노동뉴스>가 입수한 '활선공종(공사종류) 축소운영 대상 현황'을 보면 한전은 23개 직접활선공종 중 △인하선 연결 △점퍼선 절단 △전선압축 △바이패스점퍼 스틱케이블 설치 등 8개를 제외한 15개 공종을 중단시켰다.

허겁지겁 발표한 대책에 현장은 우왕좌왕

떠밀리듯 허겁지겁 전선이선공법이 중단되면서 현장 곳곳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한전은 전선이선공법을 바이패스케이블공법으로 대체하라고 협력업체에 지시했는데, 협력업체는 대체공법을 적용할 준비가 부족했다. 미처 바이패스케이블 기기를 마련하지 못한 업체가 맡은 공사현장은 올스톱됐다.

이용철 노조 광주전남전기원지부 광주지회장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업체들"이라고 귀띔했다. 바이패스케이블 장비는 보통 1억원이 넘는 고가 장비다. 올해 11월에 협력업체들이 새로 입찰을 하는데, 입찰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비싼 값에 사들인 장비가 애물단지가 될 수도 있다고 걱정한다는 것이다. 이 지회장은 "장비 구입을 안 하자니 지금 당장 공사를 진행할 수 없고 사자니 부담스런 상황이라 업체들이 갑갑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협력업체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한전은 지난 22일 업체 간 바이패스케이블 장비를 서로 임대할 수 있게 허용했다. 한전 관계자는 "22일 기준 455개 협력업체 가운데 231개(50.7%) 업체가 바이패스케이블 장비를 구비했다"며 "업체 간 임대도 허용했으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자들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직접활선작업에 사용되는 직진식 활선작업차를 구입해 개인사업자 신분으로 일하고 있는 전기원은 당장 활선작업차를 사용할 일감이 줄어들면서 불만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 광주전남전기원지부 광주지회가 지난 20~23일 현장방문을 통해 조합원들의 의견을 청취한 결과 대다수 조합원들이 전선이선공법 폐지를 환영하면서도 "소수 인원으로 바이패스케이블 장비를 사용하려니 힘들다"거나 "15년 동안 사용 안 한 장비를 사용하려고 하니 불안하다""작업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석원희 노조 전기분과위원장은 "당장은 공사의 반 이상이 중단된 상태다 보니 현장 분위기는 공황상태"라면서도 "안전한 작업환경 조성을 위해 당분간은 겪어야 할 고충"이라고 말했다.

노동자 죽어 나가는데 특수건강진단 대상서도 빠져

현장은 삐걱거리고 있지만 전기원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이 개선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분명하다. 한전은 조만간 업계 전문가와 건설노조가 참여하는 '안전 진단'을 실시할 방침이다. 변영숙 한전 배전운영처 차장은 "전선이선공법을 제외한 나머지 직접활선공법에 대해서도 안전 여부를 다시 진단해 보겠다는 것"이라며 "고용노동부·산업통상자원부 등 관련 정부부처와 전문가·노동자들도 모두 함께하는 방안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전은 앞으로 5년간 2천억원을 들여 신공법을 개발할 방침이다. 지난 23일에는 일본에 있는 안전장구회사를 방문하기도 했다.

건설노조와 상시적인 협의를 할 수 있는 틀도 마련됐다. 석원희 전기분과위원장은 "한전 배전처장·부장, 배전운영처장·부장과 상시적으로 협의할 수 있는 틀을 갖췄다"고 말했다. 한전 지역본부와 노조 지역본부도 상시협의 통로를 만들고 있다. 건설노조 관계자는 "협의틀 구성은 상전벽해 수준"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석 전기분과위원장은 "전기원 노동자들의 안전한 작업환경 조성을 위한 첫발은 뗐다"며 "직접활선공법을 대체할 신공법 개발은 물론 전기원 노동자들의 산업안전보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할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노조는 25년간 활선작업을 하던 장아무개씨가 지난해 1월 급성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은 지 넉 달 만에 사망한 이후 고압전선에서 나오는 전자기파와 직업성 암·뇌심혈관계질환 간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다. 장씨를 치료한 화순전남대병원 관계자는 "장씨의 직업력과 급성골수성 백혈병과의 관련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는 소견을 밝혔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도 초저주파 전자기장을 인체발암가능물질(Group 2B)로 분류하고 있다.

노조가 올해 2월부터 석 달 동안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암·뇌심혈관계질환 발병 노동자들은 26명이고, 이 중 4명이 사망했다. 이들은 폐암(1명)·흉선종(1명)·대장암(1명)·심장질환(1명)·뇌경색(5명)·뇌종양(1명)·위암(4명)·간암(3명, 1명 사망)·갑상선암(2명)·세포암(1명)·췌장암(1명)·심근경색(1명, 사망)·백혈병(3명, 2명 사망)·부정맥(1명)을 진단받았다.

노조는 지난달부터 이달 24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전기원 조합원 1천여명을 대상으로 혈액검사를 실시했다. 혈액검사 결과를 근거로 이달 30일 집단산재신청을 제기할 예정이다. 검사를 진행한 이철갑 조선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지난 20년간 전자기파에 노출됐던 전기원 노동자들에게 언제 어떤 질병이 발병할지 모르기 때문에 이들을 추적 관찰할 필요가 있다"며 "한전은 물론 노동부도 전기원 노동자들의 산업안전보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성주 노조 광주전남지역본부 사무국장은 "전기원 노동자들은 작업환경측정 대상도 아니고 특수건강진단 대상도 아니다"며 "우선 특수건강진단 유해인자에 전자기파를 포함시켜 정기적인 특수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전 관계자는 "어쨌든 귀 막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어서 노조에 혈액검사 결과가 나오면 공유하자고 했다"며 "결과를 보고 추가로 한전이 해야 할 부분이 있는지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노조 요구 10년 넘게 모르쇠한 한전, 마음 바꾼 이유는?

노동계의 직접활선공법 폐지 요구를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던 한전이 지난 10일 이를 전격 수용하는 발표를 한 배경을 놓고 여러 뒷말이 나오고 있다.

변영숙 한전 배전운영처 차장은 <매일노동뉴스>와 전화통화에서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사고'를 언급했다. 변 차장은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이후에 민주노총(건설노조)에서도 (전기원) 안전사고에 대한 문제제기를 많이 했다"며 직접활선작업 폐쇄 배경을 설명했다.

실제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사고로 '안전업무 외주화' 문제가 불거진 가운데, 그 즈음 전기원 노동자들의 작업환경 문제를 조명하는 보도가 잇따라 나왔다. 노조 관계자는 "혹여나 '메피아' 논란이 한전으로 옮겨 붙지 않을까 하는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조환익 한전 사장이 전기원 안전 문제와 관련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는 얘기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전의 한 직원은 "조환익 사장이 박근혜 정부 마지막 장관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며 "이미지 관리가 중요한 시기에 한전이 여론의 말밥에 오르는 걸 경계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조 사장은 개각 때마다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후보군으로 하마평에 올랐다. 마지막 개각시기를 노리고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직접활선공법 폐지를 지시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 관계자는 "한전은 '까라면 까는' 군대식 문화가 심하다"며 "조 사장이 '위험해? 그럼 폐지해'라고 했다면, 폐지하는 거다"라고 주장했다.

실제 익명 커뮤니티인 한전 블라인드에는 이번 발표에 대해 "직접활선공법 폐지는 공사하지 말라는 것"이라든지 "여론에 떠밀린 졸속발표" "진노하신 사장님 앞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관전평들이 나오고 있다. "빨리빨리 문화 때문에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거나 "바이패스케이블공법으로 시공한다고 '야매'로 사진 찍어서 보고하고 실제로는 전선이선공법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는 냉소적인 반응도 보인다.


 

 

"한전이 직접활선공법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감전사고는 한시름 놨지만 그게 다가 돼선 안 됩니다."

이철갑(54·사진) 조선대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광주근로자건강센터장)는 지난 20일 <매일노동뉴스>와 만나 한전의 직접활선공법 폐지 발표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 교수는 "솔직히 이렇게 빨리 폐지 발표를 할 줄은 몰랐다"며 "여론의 압력이 됐든 뭐가 됐든 변화를 가져 왔다는 건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오래전부터 광주지역 전기원 노동자 건강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광주근로자건강센터는 지난 2014년 광주지역 전기원 노동자 204명을 대상으로 집단의료상담을 실시해 63.7%가 근골격계질환에, 42.7%가 뇌심혈관계질환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낸 바 있다. 최근에는 건설노조 전기원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혈액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지난해 장아무개 조합원이 급성백혈병으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전자기파 노출과 암질환 사이의 관련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이 교수는 "지난달 11일 조합원 517명을 대상으로 벌인 1차 혈액검사에서 유의미한 결과가 나왔다"며 "혈액에서 비정형적인 세포들이 관찰된 노동자들이 있었고, 특히 뇌종양 가능성이 의심되는 노동자도 많았다"고 말했다. 2·3차 혈액검사 결과까지 나오면 전기원 노동자들의 작업환경과 암질환·뇌심혈관계질환 간 연관성을 의심해 볼 만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 교수가 "직접활선공법 폐지 발표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그는 "20년 넘게 장기간 전자기파에 노출된 전기원들에게 언제 어떤 질환들이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며 "전기원들의 건강상태를 장기적으로 추적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한전이 직접활선공법으로 인한 배전전기원 노동자들의 직업성 질환을 조사할 공동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교수는 "그동안 전기원 노동자 작업환경에 대한 조사는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며 "이번 기회에 한전과 노조·협력업체가 함께 노사공동위원회를 꾸려 신공법 개발은 물론 노동자들의 건강문제 전반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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