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곤 실레 <죽기 직전의 에디트 실레> 1918년, 종이에 검정 초크, 빈 레오폴트 미술관
▲ 이유리 <검은 미술관> 저자

1918년 10월 오스트리아 빈. 4년 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이제 종결을 앞두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그런데 모자란 물자와 식량, 스트레스로 인해 이미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국민 앞에 갑자기 ‘스페인 독감’이 들이닥쳤다. 유행성 독감 하나에 사람들은 속절없이 목숨을 잃었다. 스페인 독감의 마수는 한 전도유망한 화가의 집에도 어김없이 뻗쳤다.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 에곤 실레(Egon Schiele)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 에디트 실레(Edith Schiele)가 덜컥 스페인 독감에 걸리자 간병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9일 전 에디트가 스페인 독감에 걸려 폐렴을 앓고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 임신 6개월인데 상태가 아주 절망적이어서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저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고통에 겨운 가쁜 호흡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젊은 부부는 비록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별을 준비해야 했다. 실레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검정 초크로 스케치된 에디트는 배 속 아이와 함께 세상의 끈을 놓아야 하는 슬픔과 홀로 남을 남편에 대한 안타까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물끄러미 실레를 보고 있다. 하지만 이때 에디트도, 실레도 몰랐을 것이다. 죽기 전 에디트를 스케치한 이 그림이 실레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실레는 그림의 한쪽 귀퉁이에 ‘27일 밤 10시’라고 날짜와 시각을 적은 후 꼬박 밤을 샜다. 이윽고 아침 8시가 되자 에디트는 눈을 감았다. 실레는 생전 에디트가 좋아했던 꽃을 넘치도록 주문했고 통곡 속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실레는 에디트가 죽기 전에 매제인 안톤 페슈카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 앞에 큰 무언가가 있는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스페인 독감, 가족을 덮치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잔인하게도, 스페인 독감은 아내와 배 속 아이의 목숨을 가져간 걸로 모자라 실레의 목줄까지 움켜쥐었던 것이다. 공동묘지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실레는 자신의 몸이 갑자기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곤 바로 몸져누워야 했다. 그렇게 에디트가 죽은 지 불과 3일 후인 1918년 10월31일 실레 역시 세상을 떠났다. 아내와 6개월의 태아와 실레, 이렇게 세 생명이 사라지는 데 불과 4일밖에 필요치 않았던 셈이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28세였다.

에곤 실레는 1890년 6월12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도나우 강변의 작은 도시 툴른(Tulln)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철도의 고급관료로 일했으며 아버지 역시 툴른의 역장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던 실레에게, 관료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달라는 집안의 주문이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실레는 반대를 무릅쓰고 16세가 되는 1906년에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릴 때 가장 행복했다는 걸, 그 자신이 제일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실레가 탐구했던 미술세계는 바로 성(性)이었다. 누드는 당시에도 화가들의 보편적 주제이긴 했지만 모델의 성기만큼은 볼 수 없게 몸을 옆으로 틀게 한다든가 손으로 가리게 하는 등 직접적인 표현은 피했다. 하지만 실레는 이런 금기를 깨고 관람자가 여성의 성기를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노골적이고 과감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그의 누드는 자연색과 동떨어진 독특한 색감과 선명한 윤곽선, 거칠고 뒤틀린 터치로 인해 생명이 넘치는 에로티시즘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실레는 병들고 비틀린 죽은 몸뚱어리를 해부학 실습대에 놓고 마치 붓이 아니라 메스를 가지고 작업하듯 그림을 그렸다. 그의 손안에서 육체는 과감하고 집요하게 파헤쳐졌다.

이러한 실레의 작품들이 일단 세상에 나오면 그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전염병처럼 번져 있던 타락과 위선, 도덕적 이중성을 고발하는 역할을 했다. 미술평론가 아르투어 뢰슬러에 따르면 어느 날 실레를 방문한 한 변호사는 드로잉 몇 점을 구입하면서 “제게 보여 준 것보다 더 진한 것이 있을 것으로 압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변호사는 좀 더 선정적인 누드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정성에 대한 논란과 별개로 실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성공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1911년 1월 의사이자 후원자인 오스카 라이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제 작품이) 빈이 배출한 근대 최고 미술작품인 것은 분명합니다. (…) 이게 엄연한 사실인데, 그걸 굳이 숨겨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성공을 갈망한 폭주기관차 멈춰 서다

그런 ‘천재 실레’에게 어울리는 반려자는 누구였을까. 적어도 ‘발리 노이칠(Wally Neuzil)’은 아니었다. 발리는 애초 실레가 존경하고 따르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모델이었다가 1911년부터 실레의 모델이자 연인이 됐던 여인이다. 1915년까지 발리와 함께 사는 동안 실레는 그녀를 모델로 파격적인 누드화를 자유롭게 그릴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실레의 에로티시즘은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실레는 결혼만큼은 부르주아 가정의 교양 있는 여자와 하겠다는 생각을 떨치지 않았다. 자신의 배필로 어울리는 여인이 바로 에디트 하름스였다. 에디트의 아버지도 은퇴하기 전까지 철도청 공무원으로 근무했으므로, 실레에게는 하름스 집안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편안했을지 모른다. 1915년 2월 실레는 후원자인 뢰슬러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저 결혼할 생각입니다. 다행히 상대는 발리는 아닐 것 같네요.”

에디트와의 결혼을 결심한 실레는 평소에 발리와 함께 즐겨 찾던 카페로 발리를 불러 이별을 통보했다. 이후 그녀는 적십자에 종군간호병으로 지원해 1차 세계대전 전방에 투입됐고, 1917년 성홍열에 걸려 발칸반도 야전병원에서 23세의 짧은 생을 마치게 된다. 이렇게 실레의 성공 인생에 ‘걸리적거리는’ 여인이 전장에서 분투하다 숨을 거둔 동안 실레는 출세에 더 바짝 다가가게 됐다. 결혼과 함께 안정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실레는 발리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15년 6월17일 에디트와 결혼한다. 결혼하자마자 실레는 전장에 징집됐지만 1916년 9월 베를린의 평론지 <디 악티온>이 그에게 호의적인 특집기사를 실으면서 오히려 명성이 더 높아졌다. 이 명성으로 실레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1917년 군인 신분으로 빈에 있는 ‘황실 및 왕실 전사박물관’으로 파견돼 근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쟁의 한가운데에서도 실레는 자신의 경력을 일구는 데 박차를 가한다. 1918년 3월 실레는 빈 분리파의 정기전시회인 ‘빈 시세션’에 19점의 회화와 29점의 수채 드로잉을 출품했는데, 놀랍게도 출품된 대부분의 그림들이 팔려 나갔다.

이제 누구도 실레가 빈을 대표하는 ‘클림트의 후계자’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실레가 그토록 열망했던 명성과 한동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돈이 비로소 찾아온 것이다. 실레와 에디트는 빈 서쪽 교외지역인 히칭에, 정원과 커다란 이층 작업실이 딸린 집을 장만했다. 이제 그들은 행복하게 살 일만 남았다. 하지만 신은 어쩌면, 출세에 눈이 먼 ‘잔인한 남자’에게 버림받은 발리를 불쌍하게 여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때 폭주기관차 같았던 실레에게 스페인 독감이 덮쳤다. 실레가 받은 승리의 월계관은 재빨리 장례식의 화환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실레가 일평생 추구했던 행복과 명성은, 손에 쥐려고 하자마자 파랑새처럼 훌쩍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검은 미술관> 저자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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