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노조는 지난 16일 기자회견을 열고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는 국책금융기관과 많은 중소기업들을 위기로 내몰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융노조
 

국책금융기관과 중소기업의 위기를 불러올 부실 시나리오. 정책실패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한 꼼수.

정부가 조선·해운업 구조조정 재원 마련을 위해 내놓은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에 대한 국책금융기관 노동자들의 반응이다. ‘한국판 양적완화’에 대한 노동계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산업육성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은 빠뜨린 채 구조조정 실탄 마련에만 급급했다는 지적이다.

특히 국책금융기관을 한 배에 태워 동반부실 위기로 내몰고, 대기업 부실을 메우기 위해 중소기업 생존권을 볼모로 삼았다는 비판도 나온다. 법률 위반에, 결정 방식도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물고 물리는 '리스크 체인'

정부는 이달 8일 조선·해운업 부실을 메우기 위해 자본확충펀드를 통해 12조원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1조원은 현물로 출자하되, 나머지는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한다.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10조원을 시장으로 뿌리는 데에는 5개의 국책금융기관이 동원된다.<그림 참조>

먼저 도관은행으로 지정된 기업은행은 한국은행으로부터 10조원을 대출받고 이를 자본확충펀드에 재대출한다. 신용보증기금이 지급을 보증한다.

기업은행은 1조원을 자체 조달해 자산관리공사에 지원한다. 자산관리공사는 이 돈을 자본확충펀드에 후순위로 대출한다. 자산관리공사는 자본확충펀드를 운영할 특수목적법인을 세우고 관리한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조건부자본증권(코코본드)을 발행하면 자본확충펀드가 이를 매입한다.

복잡해 보이지만 구조는 간단하다. 정부는 국채 발행이나 추경 편성 같은 정공법을 피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이 경우 국회의 검증과 그 과정에서 책임 추궁과 관련자 처벌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대신 한국은행 발권력을 동원하고, 그 부담을 국책금융기관이 나눠 지도록 한 것이다. 금융노조가 자본확충펀드를 “국책금융기관의 총체적 부실을 가져올 리스크 체인”이라고 비판하는 이유다. 금융노조 관계자는 "11조원 대출의 물고 물리는 사슬 안에 정책금융기관들을 마구잡이로 끼워 넣었다"며 "조선·해운업 구조조정에 실패할 경우 정책금융기관들이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책금융기관 한 배 태워 공멸로…"

가장 큰 피해가 우려되는 국책금융기관은 신용보증기금과 기업은행이다. 특히 신용보증기금의 경우 과거 정부의 금융정책에 동원돼 입은 상처가 또 한 번 덧날 판이다. 정부는 2013년 7월 앞서 폐지된 회사채 신속인수제도를 부활시켰다. 신용보증기금을 통해 현대상선 등 5개 대기업에 시장안정 자산담보부증권(P-CBO)을 지원했다.

신용도가 낮아 회사채를 발행하기 힘든 기업의 신규발행 채권을 모아 신용보증기금이 보증하도록 했다. 노조는 강하게 반발했지만 정부의 드라이브를 막지 못했다. 보증이 이뤄졌지만 당시 지원했던 현대상선·한진해운·동부제철은 부실을 떨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신용보증기금은 무려 1조834억원을 손실처리해야 한다.

정부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당시 신용보증기금을 끌어들이며 8천500억원을 출연하기로 했는데 이 중 2천500억원을 아직도 지급하지 않았다.

김재범 노조 신용보증기금지부 부위원장은 “출연금도 미지급한 정부가 기관에 엄청난 부실을 안긴 대기업을 다시 지원하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요구”라고 지적했다.

기업은행의 부담도 만만치 않다. 신용보증기금의 지급보증을 기반으로 10조원을 재대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산관리공사의 후순위대출이 기업은행의 손실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기업은행지부 관계자는 “1조원의 후순위대출은 말 그대로 후순위대출이라 그 부담을 기업은행이 계속 안고 가야 한다”며 “자본확충펀드가 자기자본비율(BIS)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자본확충펀드에 원칙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김대업 산업은행지부 위원장은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자체적으로 코코본드를 발행해 소화할 수 있다”며 “최근 이사회가 수출입은행에 5천억원을 출자하기로 의결한 것을 봐도 그렇다”고 주장했다. 수출입은행지부도 자본확충펀드에 대해 “국책금융기관들을 한 배에 태워 공멸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라고 말했다.

금융기관 입장에서도 걱정거리다. 한 정책금융기관 관계자는 “정책이행에 따라 기관이 입을 손실을 파악하고 있지만, 금융당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라 쉬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중소기업 숨통 죄고 부실 대기업 지원

국책금융기관 손실은 중소기업이 입을 피해와 맞물린다. 정부가 부실 대기업을 살리기 위해 동원하는 정책금융기관들이 본래는 중소기업 지원기관이기 때문이다. 신용보증기금법과 중소기업은행법은 두 기관에 중소기업과 담보능력이 부족한 기업을 우선 지원하도록 하고 있다. 신용보증기금은 현재 22만개 중소기업에 보증을 서고 있다. 기업은행의 경우 총 165조8천880억원의 대출자산 중 77.5%(128조615억원)가 중소기업 대출이다.

하지만 정부가 두 기관을 대기업 지원에 내몰면서 중소기업 위기를 가중시킬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신용보증기금은 앞선 부실 대기업 지원으로 1조원을 대위변제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여기에 정부가 신용보증기금에 10조원 지급보증을 요구하며 출연하는 돈은 5천억원에 불과하다.

통상 보증액의 9~10배에서 대출이 이뤄지는 것을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한 액수다. 중소기업 지급보증 여력이 줄어드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담보 능력이 없는 중소기업들이 은행에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신용보증서가 반드시 필요하다. 대위변제에 더해 또다시 부실 대기업 지원에 나설 경우 49조원 규모의 중소기업 보증 자체가 흔들린다. 신용보증 1억원당 중소기업 고용창출인원은 1.08명이다. 정부가 부실 대기업 지원으로 10만명의 고용창출 기회를 날리더니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

장욱진 신용보증기금지부 위원장의 말이다.

신용보증기금이 중소기업 지급보증을 하지 않으면 그만큼 중소기업이 돈을 꾸기 어려워진다. 김성철 기업은행지부 정책국장은 “재대출하는 10조원의 상환이 늦춰질 경우 자체적으로 위험자산을 줄여야 한다”며 “신용대출보다 담보대출이 많은 가계대출과 위험도가 낮은 대기업 대출은 그대로 둔 채 중소기업 대출이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부가 자본확충펀드를 조성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국내에까지 유동성 위기가 찾아오자 20조원 규모의 은행자본확충펀드를 조성했다. 그런데 목적과 형식에서 지금 방식과 큰 차이가 있다.

정명희 금융경제연구소 실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막론하고 산업 전체에 자금경색이 생겨 은행까지 동반부실을 겪게 될 상황이라 정부가 당시 산업은행을 도관은행으로 펀드를 조성한 것”이라며 “대기업 몇 개를 살리겠다고 중소기업 기반을 무너뜨리고 금융시장을 총체적 위기로 빠뜨리는 지금의 방식은 유례가 없다”고 비판했다.

은행법 위반 논란에 기관장도 배제

정부가 자본확충펀드 조성 계획을 발표한 날 공교롭게도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의 폭로가 나왔다. 그는 산업은행이 지난해 대표적인 부실기업인 대우조선해양에 4조2천억원을 지원한 것에 대해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임종룡 금융위원장·진웅섭 금융감독원장이 결정한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노동계가 자본확충펀드를 두고 “조선·해운업 부실을 키운 정부 책임과 금융정책 실패를 덮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한 것에 힘이 실렸다.

정부 의사결정을 두고도 말이 많다. 펀드조성 계획 발표는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지난달 4일 정부는 '국책은행 자본확충 협의회'를 꾸렸다. 이후 단 두 차례 회의를 가졌다. 관계장관들이 처음으로 만난 자리에서 방안이 확정됐다. 자본확충펀드 조성에 참여하는 일부 기관장들조차 정부 발표 전까지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

위법논란까지 제기된다. 한국은행법에 따르면 금융기관에 대한 긴급여신은 유동성이 악화된 기관에 한해 이뤄져야 하는데, 기업은행은 그렇지 않다. 또 은행법은 자기자본의 25%까지를 여신 한도로 정하고 있다. 그런데 기업은행의 자본총계는 올해 3월 현재 17조4천억원이다. 정부가 요구하는 10조원을 대출할 경우 자기자본 대비 여신 비율은 58%에 달한다.

노동계는 △자본확충펀드 조성안 폐기 △진상규명과 사회적 합의를 통한 의사결정 △부실을 키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정명희 실장은 “국채를 발행해 국책은행 자본금으로 넣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며 “부실을 방조한 정부 관료와 정치권 낙하산 문제, 회계법인 문제도 반드시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부)는 “정부가 자본확충 방안을 논의하며 국회를 피하려 했던 이유는 야단맞기 싫어서였는데, 청문회가 기정사실화되면서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며 “추가경정예산으로 국민에게 돈을 빌려 국책은행 자본을 확충하는 정면돌파가 답이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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