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한국 노동자들은 전부 사장이에요. 사장처럼 (이주노동자들을) 때려요.”

“한국 사람들은 강자한테 약하고, 약자한테는 한없이 강해요.”

남들도, 스스로도 알고 있는 치부를 누군가가 다시 확인시켜 주면 어떨까. 처음 들키는 것보다는 덜하겠지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지난 22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만난 우다야 라이(46·사진) 서울경기인천이주노조 위원장과의 인터뷰가 그랬다. 아시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은 그런 곳이다. 이주민을 차별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지만, 지독한 인종차별과 멸시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라이 위원장은 인터뷰 내내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로서 목격한 한국의 민낯을 직설적으로 고발했다.

한국생활 18년째인 그는 한국어를 곧잘 했다. 의사소통을 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한국에서 받은 편견과 차별을 토로할 때는 달랐다. 말이 빨라지면서 알아듣기 어려운 얘기를 쏟아 냈다.

이주노조 합법화 1년
조합원 늘었지만 현실은 그대로


이달 25일은 대법원이 “취업자격이 없는 외국인이라도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조에 가입할 수 있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린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해 6월 대법원 판결은 서울경기인천이주노조가 고용노동부에 설립신고서를 제출한 2005년 5월3일부터 반려와 법정 소송을 거쳐 10년 만에 이뤄 낸 쾌거였다.

노조는 판결이 나오고도 3개월이 지나서야 설립신고증을 받았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해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 뒤 노조는 조합원 확대에 힘을 쏟았다. 1년간 180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노조에 들어와 조합원은 1천200여명이 됐다. 최근에는 김포지부가 새로 생겨 지부가 6개에서 7개로 늘었다.

라이 위원장은 “스스로 찾아온 이들도 있고 노조 홍보를 보고 가입한 노동자들도 있다”며 “기대한 만큼은 아니지만 절반 정도 목표를 이뤘다”고 말했다.

노조는 조만간 규약을 바꿀 계획이다. 서울·경기·인천지역만이 아닌 전국 이주노동자들이 노조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실 이주노조가 합법화하거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한다고 해서 현실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한국 정부에게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잡아서 쫓아내야 할' 대상이다. 당장 고용허가제를 개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정부는 올해 4월부터 강도 높은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을 시작했다. 연간 20주에 걸친 합동단속으로 “11.3%인 불법체류자 비율을 2018년까지 9.3%로 낮추겠다”고 공언했다.

단속반과 이주노동자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검거를 피하려다 다치는 이주노동자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올해 3월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6월 시행)이 제정되고 출입국관리법까지 개정되면서 사정이 더 나빠졌다. 테러를 막는다는 이유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정부 감시나 입국 제한이 강화된 탓이다. 인권침해 소지가 커질 수밖에 없다.

“아직도 이주노동자들은 회사를 마음대로 옮길 수 없어요. 그런데 테러방지법과 출입국관리법에 따라 정부 당국이 의심하는 이주노동자들은 개인통장까지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한국 출입국관리법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이 자기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출국하는 것조차 제지를 당할 수 있는 실정이에요.”

라이 위원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저임금 협상을 지켜보면 외국인들의 최저임금은 따로 정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와요. 정말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요?”

이주노동자들을 옭아매고 차별하자는 주장이나 계획이 끊이지 않는 곳. 그들에게 한국은 그런 곳이다.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가 본 한국
“한국 노동자들은 다 사장이에요”


라이 위원장의 고향은 히말라야산맥으로 유명한 네팔이다. 한적한 시골에서 4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거기서 농사를 지었고, 일이 없어 놀기도 했다. 그런데 노모와 남매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그도 여느 이주노동자들처럼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99년 말, 지금은 없어진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처음엔 경기도 고양시 원당의 가구공장에서 일했다. 열심히 돈을 벌어 고국에 돈을 보낼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음…. 한국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

라이 위원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억지로 생각해 내는 듯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주노동자들의 임금은 한국 노동자들보다 쌌다. 한 달에 50만원 정도였다. 그러면서 장시간 일했다.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했다. 빨리 돈을 벌어 네팔에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함께 일하는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시간도 덩달아 길어졌다.

“니네들 때문에 우리가 일하는 시간이 엉망이 됐어.”

한국인 동료들은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때리기도 했다.

“사장한테 괴롭힘을 당하기보다 동료들한테 더 많이 당했어요. 나쁜 사장이 우리를 때린다고 생각하지요? 두들겨 맞는 이주노동자 중 사장한테 맞는 사람들은 20%밖에 안 돼요. 나머지는 동료들한테 맞는 거예요.”

견디지 못하고 가구공장을 뛰쳐나왔다. 이른바 ‘불법체류자’가 됐다. 한국에 온 지 6개월 만이었다.

돈 벌 곳을 찾아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한 번은 서울 동대문에 있는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인들보다 더 오래 일했다. 한국인들이 자는 시간에도 일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던 근무시간이 밤 9시로 늘어났다가, 급기야 밤 12시까지로 바뀌었다. 나중에는 한국인 노동자들도 그렇게 일하게 됐다.

가구공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인 동료들이 그를 괴롭히고 때리기 시작했다. 동료들만이 아니었다. 부장·과장 같은 중간관리자들도 스스럼 없이 때렸다. 사장 동생이나 처남도 그랬다. 그들은 사장에게 잘 보여야 했다. “빨리빨리 하라”며 손과 발로 때렸다.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가 보기에, 한국에서 사장과 노동자는 구분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한국 노동자들은 다 사장이에요. 노조가 없는 곳은 특히 그래요.”

라이 위원장의 겉모습은 한국인과 똑같다. 그가 먼저 “네팔에서 왔어요”라고 말하지 않으면 한국인으로 볼 정도다. 그런 그에게 한국인들은 처음에 높임말을 썼다고 한다.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반말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한국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한테 고개를 숙이잖아요. 그런데 동남아시아 사람들한테는 안 그래요. 어깨에 힘을 줘요. 이렇게 이렇게.”

라이 위원장은 어깨를 과장되게 들어 올리며 한국인들을 흉내 냈다.

“강한 사람한테 약하고, 약한 사람한테는 한없이 강해요.”

▲ 정기훈 기자

네팔인 신랑과 한국인 신부, 그리고 결혼비자

불법체류자 신세였던 라이 위원장은 이주노동자들이 많은 곳에 가지 않았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단속 나온 공무원들을 피하기 위해서다. 단속반이 자주 온다는 사거리 같은 곳도 피했다. 웬만하면 공장 기숙사나 자취방에 있었다.

2년 정도 그렇게 하다 노조를 알게 됐다. 그것도 자신처럼 이주노동자들만을 위한 노조였다. 2001년, 지금은 해산하고 없는 평등노조 이주지부라는 곳에 가입했다. 검거 위험을 무릅쓰고 ‘불법체류자 단속 반대집회’에 자주 참가했다.

“친구들이 겪은 문제들, 내가 경험한 문제들을 노조에 가면 해결해 달라고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뉴스에 나오는 이주노동자들처럼 단속반에 쫓기는 일은 없었다. 자주 옮겨 다녔지만 일은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인생의 반쪽을 찾았다. 2003년 동대문 봉제공장에 다닐 때였다. 옆 공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아가씨를 알게 됐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한국인 아가씨도 네팔에서 온 이방인이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둘은 자연스럽게 연인이 됐고, 2005년 결혼했다.

한국인과 외국인이 결혼하면 양가의 심한 반대에 부딪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네팔에 있는 라이 위원장 가족도, 한국의 처가가 될 쪽도 반대하지 않았다.

“네팔이나 한국이나 부모 마음은 같아요. 자기 자식이 자기 나라 사람과 결혼하기를 원하지요.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았어요.”

언제 강제출국을 당할지 모르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 결혼은 단순히 남녀 간의 결합이 아니었다. 결혼하고 2년여 뒤 그는 결혼비자를 취득했다. 합법적인 이주민이 된 것이다.

그런데 결혼비자에 대해 말하던 라이 위원장이 갑자기 흥분했다. 목소리가 커지고 말이 빨라졌다.

“한국 사람들이 그래요. ‘오~오~ 하늘에서 (복이) 떨어졌다’고. 그래서 (결혼비자에 대해) 말하기 싫어요.”

“불법체류자가 한국 여자 만나 횡재했다”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좋은 사람을 만났고, 좋아서 결혼했을 뿐인데.

“사람과 사람이 만난 거예요. 그게 다예요.”

“우리가 필요하다면, 사람답게 대우해 줘요”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살 수 있게 된 라이 위원장은 2009년 지금의 이주노조에 가입했다. 노조활동을 열심히 했다. 고국인 필리핀에 잠시 귀국했던 미셸 카투이라 전 위원장이 한국 입국을 거부당하자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2014년 10월 위원장이 됐다. 지금은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전략사업실 이주사업 담당 차장을 겸임하고 있다.

노조위원장이자 활동가가 됐지만 아직도 고국의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낸다. 민주노총 차장으로 받는 월급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노동자든, 노조위원장이든 간에 고국에 돈을 보내는 것은 이주노동자들의 숙명이다.

라이 위원장은 “가족들에게 돈을 보낼 수 있어 행복하다”고 웃었다.

네팔의 가족들은 라이 위원장이 노조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 제도개선을 요구하면서 힘겹게 싸운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그의 가족이 그렇듯 다른 이주노동자의 가족들도 자신의 아들딸이, 형제자매가 한국에서 어떻게 돈을 버는지 잘 모를 것이다.

“고국에 있는 이주노동자 가족들은 한국만 가면 쉽게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곳이 얼마나 힘든지, 이곳에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있는지 몰라요.”

라이 위원장을 한국에 불러들인 것은 산업연수생 제도였다. 2004년 8월17일부터는 고용허가제로 바뀌었다.

이주노동자들이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하려면 최대 수천만원이 필요했다. 브로커에게 주는 돈이었다. 돈 좀 있는 사람, 돈을 빌릴 수 있는 사람만 한국에 올 수 있었다(당시 라이 위원장은 운이 좋아 150만원에 한국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고용허가제가 시행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한국어시험만 통과하면, 항공비만 있으면 한국에 들어올 수 있게 됐다. 산업연수생과 달리 근로기준법과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보호도 받는다. 라이 위원장은 “산업연수생 제도보다는 고용허가제가 발전한 제도가 맞다”고 말하면서도 "불법체류자를 양산하는 제도"라고 지적했다.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은 3년 동안 직장을 세 번 옮길 수 있다. 그런데 이주노동자 마음대로 사업장을 옮길 수가 없다. 회사가 없어지거나 사용자가 근로조건을 위반하는 식으로 노동자 책임이 없어야만 옮길 수 있다. 조건도 절차도 까다롭다. 근로조건이 열악하다는 이유만으로는 다른 직장에 못 간다. 법적으로 사업장을 바꿀 조건이 되더라도, 감독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사례도 많다.

3년의 계약기간이 끝나고 1년10개월간 체류기간을 연장받으려면 사용자 동의가 필요하다. 결국 사용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횡포를 참든지, 회사에서 도망쳐 불법체류자가 돼야 한다.

“산업연수생은 노동자가 아니었지만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사람들은 노동자로 인정해 준 거잖아요. 그래서 근로기준법·산재보험법을 다 적용했잖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보장을 안 해 줘요. 잘못된 법 때문에 미등록 상태가 된 사람들은 합법화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라이 위원장은 “우리가 없어도 중소기업을 운영할 수 있다면 더 할 말은 없지만 사람이 부족해서 데려왔다면 사람답게 대우해 줬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이주노동자들도,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사실 한국에 들어와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고용허가제의 문제점을 잘 알지 못한다. 나쁜 제도가 나쁜 사장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노동자들은 사장만 나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참기만 해요. 제가 말하는 고용허가제 문제점을 이주노동자의 90%는 동의하지 못할 걸요? 그래서 조합원을 늘리기가 어려워요.”

라이 위원장은 “누군가가 도와주는 것은 한계가 있고,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주민 관련 노조 활동이 활발하다. 그 나라 노동자들이 적극 지원하고 연대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인 노동자들의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인 노동자들도 힘들고 바쁘잖아요. 열 명 중에 한 명만 노조에 가입했다면서요. 그들도 탄압을 많이 받고 있잖아요. 한국인 노동자들이 모두 노동 3권을 갖게 되면 우리와 함께하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라이 위원장은 올해로 한국 생활 18년째다. 마음만 먹으면 네팔과 한국을 오갈 수 있다. 나중에 네팔에서 살지 한국에서 살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다만 한국에 있는 동안은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이주노조 위원장으로서 이주노동자들이 마음 편하게 일하는 세상을 만드는 게 그의 꿈이다.

“건강하게 살고 싶어요. 아는 사람들도 잘됐으면 좋겠어요.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그러려면 모든 게 뒷받침돼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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