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영 인더스트리올 아태지역 전력네트워크 의장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갇힌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다. 거리의 신호등도 꺼지고 방향을 잃은 차들이 갈피를 잡지 못한다. 세상을 연결해 주던 TV조차 꺼져 버린 세상. 공상과학(SF)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종말의 순간처럼 2011년 9월15일, 현대 문명의 이기가 작동을 멈춰 버리자 대한민국은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사람들의 일상은 그대로였지만, 그 일상을 움직였던 전기가 사라진 세상. 사람들은 단전으로 인해 세상이 멈춰 설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한전을 직접 방문해 임직원을 질타하며 국민의 충격과 분노를 위로(?)했다.

전기가 사라진 이유는 전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알릴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부족하게 됐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소위 중요하지 않은(?) 지역이나 시설부터 순차적으로 전기 공급을 차단한 것이다. 여름을 훌쩍 넘긴 9월 중순, 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전력수요가 급증했다. 여름철 내내 아슬아슬한 전력수요를 맞추기 위해 풀가동했던 많은 발전기들은 정기점검 중이었고, 급증한 전력수요를 담당할 예비발전기는 많지 않았다. 그조차도 1~2시간 내 가동할 수 있는 발전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9월 중순 갑작스런 무더위, 이를 예측하지 못한 전력당국, 그리고 부족한 발전소. 이런 표면적인 이유가 갑자기 전력이 사라진 세상을 만든 원인은 아니었다. 근본적인 이유는 2000년 이후 민영화와 경쟁을 확대해 온 정책실패 결과였다. 어쩌면 경쟁이 확대되면 될수록, 민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더 무서운 사태를 부른다는 것을 예고하는 작은 징후였을지도 모른다.

구조개편 이후 정부는 한전에서 분할된 발전자회사 민영화와 더불어 한전의 배전(판매)부문을 분할해 민영화하고 경쟁체제를 구축하기로 예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전노조 파업과 전력노조의 배전분할 저지투쟁 결과로 정부 정책이 사실상 무산되면서 유사 민영화와 경쟁확대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민자발전으로 일컬어지는 대기업의 발전사업 진출을 확대했고, 대기업이 한전을 통하지 않고 전력을 직접 구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전력 직거래제도를 도입했다. 일정구역 내 발전과 전력공급을 독점하는 구역전기 사업제도, 민간이 전력수요를 조절하는 전력 수요관리 거래제도 등 사실상 민영화의 범주라 할 모든 정책수단을 동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윤이 목표였던 사적 자본은 ‘전력공급 안정성’ 같은 공공성을 수행할 의무도, 이유도 없었다. 2000년 중반 이후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하자 수익성 악화를 우려한 대기업들은 애초 짓기로 약속했던 발전소를 포기하거나 또는 건설을 지연시키기 시작했다. 2011년 정전사태 발생 당시 민간 재벌자본이 참여한 신규발전소 준공은 당초 허가를 신청했던 설비용량 대비 20~30%에 불과했다. 계획됐지만 착공하지도 못한 발전용량은 무려 원자력발전소 7기에 달하는 700만킬로와트를 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전력 공급부족 사태의 핵심적 원인이었다.

에너지 가격 정책 또한 전력 부족사태의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MB 정부는 듣도 보도 못한 'MB물가지수'라는 것을 만들어 공공요금을 비정상적으로 통제했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석유·가스·석탄 같은 1차 에너지의 국제가격이 급등하면서 국내 에너지가격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그러나 석유와 석탄·가스를 이용해 생산하는 전기 가격은 물가안정을 내세워 꽁꽁 묶어 뒀다. 석유와 가스로 움직이던 많은 시설들이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전기로 전환되는 소비대체가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공급설비 부족에 이어 설상가상으로 전력수요까지 급증하면서 2010년 이후 전력 수급위기는 계절과 시간대에 무관하게 만성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민자 발전 중심의 공급정책, 그리고 물가안정을 내세운 비정상적인 에너지 가격정책 등 전력수급정책의 실패가 2011년 전국적인 순환정전 사태를 촉발하게 된 핵심적인 원인이었던 것이다.

수급위기는 정전사태로만 끝나지 않았다. 전력 공급부족은 역설적으로 민자 발전사업자들에게 떼돈을 벌게 했다. 전력 공급부족과 수요증가는 한전이 발전사를 통해 구입해 오는 전력 구입가격을 천정부지로 오르게 했는데, 이른바 계통한계가격(SMP)이라는 발전 경쟁체제의 요금결정 방식 때문이었다. 대신 소비자 전기요금은 정부 규제로 구입 전력가격을 제대로 반영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한전은 100원에 구입해서 120원에 팔아야 하는, 콩값보다 싸게 두부를 팔아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을 5년 넘게 계속하면서 무려 11조5천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적자를 기록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정전사태의 재현이었던 것이다. 전기가 부족해 정전이 발생했다는 정부. 그러나 정작 전력부족의 진짜 원인이었던 전력정책을 결정하고 밀어붙였던 관료들은 아무도 그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인더스트리올 아태지역 전력네트워크 의장 (peoplewin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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