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단체교섭 시기에 사업장을 방문하거나 경영사정이 어려워진 회사를 찾았을 때 종종 볼 수 있는 플래카드가 있다. 플래카드에는 ‘기초질서 지키기 캠페인’이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다. 회사가 어렵지 않더라도 요즘처럼 구조조정이 음습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는 회사도 있다. 이런 장면은 필자가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2000년에도 있었고 오늘도 변함없이 일어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장면은 우스꽝스럽게 변화하고 있다. 진화인지 퇴화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며칠 전 한 언론에 현대자동차그룹 양재동 사옥 1층 장면을 찍은 사진이 보도됐다. 점심시간을 앞두고 직원들이 출입구에 서서 대기하는 장면이었다. 마치 경주마가 출발대에서 기다리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사진만 보더라도 정각 12시에 출입구 문이 열리면 직원들이 밀물처럼 쏟아져 나올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회사는 이런 장면을 ‘기초질서 지키기’라고 한다.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하던 캠페인을 사무직이 근무하는 양재동 사옥까지 전이시킨 것이다. 해외 토픽감으로 손색이 없는 장면이다. 사장은 이런 모습을 보고 기초질서가 잘 지켜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기초질서를 강조하는 다른 장면도 있다. 제조업 생산공장이 있는 회사다. 정오에 맞춰 공장 구내식당에 갔을 때 매우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식당 문 앞에는 족히 100명은 넘어 보이는 직원들이 몇 개의 줄을 만들어 대기하고 있었다. 식당은 정확히 12시가 돼야 문을 연다. 문이 열리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사원들은 쏜살같이 달려 배식구 앞으로 뛰어갔다. 먼저 점심을 먹기 위해서다. 저렇게까지 해서 점심을 먹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기초질서라는 이유를 들어 노동시간을 획일적으로 통제하려다 보니 이런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다. 이런 통제는 전체주의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방식이다. 수천명이 근무하는 회사에서 그 많은 직원이 12시에 맞춰 한꺼번에 점심을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식당이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회사가 노리는 것은 다른 데 있다. 기초질서 캠페인을 노동자 통제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기초질서를 지키지 않는 직원에게는 불이익을 줄 것이라는 일종의 압력이다. 요즘처럼 구조조정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직원들은 회사의 이런 캠페인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직원들은 회사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이런 캠페인은 매우 단기적인 처방이다. 단기적으로 노동자 군기를 잡겠다는 단순한 발상이다. 회사는 노동자에게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회사에 몰입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처방을 내놓아야 한다.

노동자가 점심시간에 보이는 행동은 다른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다. 노동자에게 1시간의 점심시간은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시간이다. 노동강도가 센 노동을 할수록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점심시간에 노동자들이 먼저 식사를 하려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더 휴식을 취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근본적인 처방은 노동강도를 완화하고 노동자들이 노동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작업장을 만드는 것이다. 자동차 조립공장에서 온종일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노동자에게 노동은 생계 수단 이상의 가치를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도 독일의 그룹작업처럼 개인의 기술과 사회적 숙련을 높일 수 있는 작업방식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기초질서는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구성원이 지켜야 할 규범(norm)이다. 경영진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지금처럼 노동자에게만 일방적으로 기초질서를 강요하는 방식은 공정하지 못하다. 또한 공동체 생활에서 구성원의 일탈행위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건강한 조직일수록 개인의 일탈행위를 개인 문제로만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조적 문제로 인식한다. 요란스럽게 ‘기초질서 지키기’라는 문구를 적은 플래카드를 내걸지 않아도 구성원 스스로 규칙을 지키는 조직이 건강하고 성숙한 공동체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워크인연구소 연구실장 (imksgo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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