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영 인더스트리올 아태지역 전력네트워크 의장

2004년 배전분할 중단은 전력산업 민영화와 경쟁체제를 옹호하며 이를 강하게 추동한 이데올로그들에게는 뼈아픈 실책이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민영화와 경쟁체제를 지탱해 왔던 화려했던 그들의 이론과 이를 실현할 정책 기반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명박 정권의 압도적인 승리, 그 승리에 도취한 화려한(?) 출범은 구조개편을 통해 전력산업을 장악하고자 했던 자본과 이들의 든든한 지원군인 관료·정치가, 이데올로그들에게는 반격의 기회였던 것이다. 이들의 화려한 활약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내세운 공기업 개혁정책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공기업의 ‘예외 없는 민영화’ 원칙을 내세우며 통·폐합과 경영혁신, 민영화를 밀어붙이려 했다.

뜻밖의 반전은 국민의 뜻을 도외시한 미국산 쇠고기 파동에서 시작됐다. 투명하지 못한 협상 과정, 그리고 안전이 확인되지 않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허용에 대한 국민 불안은 분노로 바뀌었고, 나아가 전기·가스·수도·의료 등 국민 생활과 안전에 필수적인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하겠다는 MB 정권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반대여론이 비등해지자 마침내 정부는 필수서비스 민영화는 하지 않겠다며 국민 분노를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전력산업 민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던 자본과 권력 입장에서는 통탄할 일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전력산업 민영화를 포함한 구조개편 시도는 MB 정부 내내 지속됐다. 이에 맞선 전력부문 노동자들의 대응은 민영화 반대, 구조개편 저지라는 수세적 입장에서 공세적으로 전환됐다.

전력노조를 포함해 발전노조·한수원노조 등 전력부문 노동조합은 당시 김상곤·김윤자 교수를 포함한 ‘전국교수공공부문연구회’와 공동으로 전력산업 발전방안에 대한 정책연구를 진행해 전력산업의 통합적 운영체제를 비롯한 민주적 거버넌스 방안을 확정하고 정부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2009년 정기국회는 구조개편 정책 찬반이 격렬하게 부딪치는 공간이었다. 대부분의 의원들은 한전 분할 이후 전력산업이 오히려 성과보다는 수급안정성을 약화시키고 비용이 상승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전력산업 재통합 방안을 주문했다. 단기적으로는 전력거래소의 전력계통 운영을 설비 소유주체인 한전이 수행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사실 그랬다. 분할 이후 일하는 노동자는 줄이고 소위 윗자리는 눈에 띄게 늘어났다. 당시 서울 삼성동 한전 본사 10층과 11층에는 사장과 감사 14명의 집무실이 포진해 있었고, 출퇴근 때 검은승용차와 수행비서들이 현관에 늘어선 진풍경을 연출했다. 고장이 늘고 노동자 산재도 증가했다. 발전연료를 개별 발전사들이 제각각 구매하다 보니 협상력 저하로 인해 구매단가가 인상된 것도 문제가 됐다.

수세에 몰린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는 전력산업 정책방향을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고, 연구용역을 통해 중장기 방안을 제출하겠다며 서둘러 봉합에 나섰다. 지경부가 발주하고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수행한 전력산업 발전방안 연구는 이듬해인 2010년 7월께 발표됐다. 그러나 공식적인 발표가 있기 전부터 언론을 통해 그 결과가 개략적으로 보도되면서 노정 간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한편에서는 연구 결과가 정부 의도에 맞지 않자 결과를 뒤집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노정 갈등이 표면화했다. 갈등은 엉뚱한 곳에서 분출됐다. 당시 발전부문의 소매업 허용, 한전과 한수원 통합 등 어느 누구도 납득하기 힘든 정책이 제안됐다. 결과 발표 공청회장에서 전력노조가 격렬하게 반대를 표명하는 과정에서 한수원 본사 이전 지역인 경주시민들의 통합반대와 섞여 공청회장이 아수라장이 됐다. 이러한 상황은 언론에 크게 보도됐고, 구조개편에 대한 이해당사자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재통합이 아니라 오히려 경쟁 확대를 제시한 연구용역 결과는 벌집을 건드린 결과를 초래했다. 전력노조는 연구수행기관인 KDI를 항의방문해 연구 과정과 결과에 대한 공정성 문제를 제기했다. 이어 지경부 항의집회·거리선전전 등 전면전을 각오한 투쟁에 돌입했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지경부는 화해모드로 전환했다.

“김주영 위원장님, 한전 판매분할? 이거 어렵습니다. 앞으로 이삼십 년 가도 힘들겁니다.”

당시 지경부 차관은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정부 입장에서도 한전의 판매분할 민영화 정책은 중장기적으로나 검토할 사항이라고 실토하며 전력노조의 자제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력산업 민영화 정책은 MB 정부 내내 화두가 됐다. 2010년 국회에서는 한전과 전력거래소의 통합을 위한 법안이 지식경제위원회(현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여야 의원 전원 발의로 제출됐지만 지경부와 대기업의 활약(?)으로 무산됐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에는 에너지경제연구원을 통해 민영화 방안에 대한 연구용역이 진행되기도 했다.

노동조합은 급진적인 분할 민영화 정책을 무산시켰지만 한 번 터진 민영화의 물꼬를 완전히 틀어막지는 못했다. 승리를 온전히 지켜 내지 못한 노조, 그 때문에 친자본적인 정권이 민영화의 대세를 점진적으로 확장하고 궁극적으로 그들이 지향하는 전력산업 민영화의 큰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인더스트리올 아태지역 전력네트워크 의장 (peoplewin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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