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노총

"주 32시간 파트타임으로 들어와서 40시간 풀타임처럼 3~4년을 일하다 겨우 풀타임(정규직)이 됐는데, 이제 와서 32시간도 아니고 30시간 파트타임을 하라고? 장난하나?"

주한미군은행 커뮤니티 뱅크(Community Bank·CB)에서 근무하는 김문국(가명)씨는 배신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올해 3월15일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7월1일부터 주당 30시간 시간제 일자리로 전환하겠다는 통보였다. 기습에 가까웠다. 이런 전화를 받은 사람은 김씨만이 아니었다. 7급 이하 직원 50여명이 파트타임 전환 예고통보를 받았다.

15년 전 김씨는 주 32시간 파트타임 노동자로 입사했다. 통상 파트타임으로 일하다 자연감소 등으로 정규직에 빈자리가 생기면 근무평가·면접을 거쳐 정규직으로 전환된다. 정규직 전환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거의 모든 직원이 파트타임으로 들어왔어도 40시간을 꽉꽉 채워 일한다. 관리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다. 그렇게 4년 만에 정규직이 된 김씨는 10년 만에 그때보다 외려 2시간 줄어든 시간제 노동자 전환을 앞두고 있다.

그는 "공공기관이나 기업에서는 자기가 필요할 때 시간제 일자리를 선택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매년 100억원씩 이자수익을 내는 은행이 그 돈은 다 어디다 두고 직원들을 파트타임으로 전환시키는 건지 모르겠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주한미군한국인노조 서울지부 미국은행분회는 노사회담에서 "은행이 어렵다면 전체 직원이 직급을 한 단계씩 낮추고 월급을 반납해 고통을 분담하겠다"는 파격적인 안을 제안했지만 은행측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용산미군기지 세탁소에서 일하는 박민숙(가명)씨도 '멘붕'을 겪고 있다. 얼마 전 확인한 미군기지 이전대상 부서 목록에 세탁소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측에 "왜 세탁소가 이전 부서에서 제외됐냐"고 물었는데, 별다른 설명 없이 "이전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답변만 들었다. 전체 미군기지 가운데 세탁소가 있는 곳은 용산기지가 유일하다. 주로 용산 121종합병원에서 나오는 환자복과 담요·시트를 세탁하는 일을 한다. 미군측은 세탁소를 아웃소싱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박씨는 "세탁소는 전국에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기지가 이전하면 당연히 따라갈 줄 알았다"며 "버젓이 직원들이 일하고 있는 세탁소를 폐쇄하고, 외부에 하청을 준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

서울 용산 주한미군사령부와 동두천·의정부에 위치한 미 2사단의 평택 이전을 앞두고 이전대상 기지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고용 문제가 주목받고 있다. 이들의 고용주인 주한미군의 일방적인 노무관리 행태 또한 재조명되고 있다.

주한미군한국인노조(위원장 최응식)에 따르면 최근 미군기지 평택 이전이 본격화하자 기지 안에서 직급 강등과 주 40시간 풀타임 노동자들을 주 30시간 파트타임으로 전환하겠다는 통보가 잇따르는 실정이다.

주한미군 내 물품판매를 담당하는 교역처(AAFES)는 흑자운영을 하면서도 지난해 이전대상 기지 직원의 50%를 시간제 일자리로 전환하거나 직급을 한 단계씩 강등하겠다고 통보했다. 커뮤니티 뱅크는 7급 이하 정규직 직원 전원을 주당 30시간 시간제 일자리로 전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부서를 폐쇄하고 아웃소싱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직원 50여명이 해고 위기에 내몰린 세탁소도 비슷한 경우다. 노동자들은 몇몇 모이기만 하면 "다음 타깃 부서는 어디냐"며 불안감을 호소한다.

주한미군기지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07년 이전에는 미군기지 폐쇄에 따른 주한미군 감축이 한국인 노동자들의 고용을 위협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면 2007년 이후에는 미국경제 악화가 주요 요인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미국발 금융위기로 재정이 나빠지자 미 국방부는 2011년 이후부터 예산을 축소했다. 그러자 주한미군측은 한국 노동자들을 자르고 근무시간을 줄여 버렸다. 미국 정부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인건비 중 25% 부담한다. 경제위기가 심각했던 2012년에만 한국인 노동자 560명이 감원을 당했다. 한국인이 해고된 일자리는 주한미군 가족이나 미국인으로 채워졌다. 주한미군이 2014년부터 펼치고 있는 '아이디얼 스태핑(Ideal Staffing)'<상자기사 참조> 정책은 인건비 절감과 미국인들의 실업난 해소를 위해 도입된 제도다.

2007년 이후 주한미군은 2만8천500명선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반해 2007년 1만2천850명이었던 한국인 노동자는 1만2천명으로 줄어들었다.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가 인건비를 대지 않고, 주한미군의 영업이익으로만 운영되는 비충당자금(Non-Appropriated Fund) 기관에서도 최근 몇 년간 경영상태와 무관하게 강등과 시간제 일자리 전환이 계속되고 있다. 미군 PX인 주한미군 교역처(AAFES)와 클럽·호텔 등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복지지원단(FMWR), 주한미군은행인 커뮤니티 뱅크가 대표적이다.

주한미군은 2014년 복지지원단에서 일하는 주 40시간 노동자의 근무시간을 최대 20시간까지 감축했다. 문제는 주한미군이 노동시간을 턱없이 줄이면서도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유조차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주한미군이 노조에 보낸 통보서를 보면 허탈할 정도다. "매상 동향을 분석한 후 운영상 필요에 따라서(Based on operational needs after analysis of sales trends)"가 전부다.

"경영상태가 좋은지 안 좋은지 확인해 줄 순 없지만 우리가 봤을 땐 당신이 조금만 일하는 게 필요한 것 같으니"라는 표현과 다르지 않다.

은행도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방위비분담금으로 한 해 수백억원대 이자놀이를 한 사실이 밝혀진 커뮤니티 뱅크는 "경영사정이 어렵다"며 정규직 직원의 절반에게 주 30시간 시간제 일자리 전환을 통보했다.

"우리는 통보했으니 당신은 따라야 한다"는 게 주한미군의 방식인 셈이다. 한마디로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라고나 할까.

▲ 배혜정 기자

부당해고·탄저균 배달사고에도 근로감독은 '남 일'

주한미군이 답정너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손지오 노조 사무국장은 "주한미군이 오만불손하게 된 건 한국에서는 그렇게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손 국장은 "한국인 노동자들이 부당해고가 됐다, 탄저균과 석면에 노출됐다, 아무리 외쳐도 고용노동부에서 근로감독 한 번 나오지 않는 현실만 봐도 그렇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 당시 고용노동부가 장하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노동부는 최근 3년간 주한미군기지와 기지 내 사업장에 대한 근로감독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장 전 의원은 "노동부가 대한민국 모든 사업장에 대해 적어도 2~3년에 1번씩은 근로감독을 실시해 노동법 준수 여부를 확인하면서도 유독 주한미군 기지 한국인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조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노동 3권을 제약하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노무조항(제17조) 개정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노동 3권 중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보장된 권리는 사실상 단결권밖에 없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에 의하면 노동자들은 노동위원회 조정절차만으로 쟁의행위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주한미군 한국인 노동자들은 SOFA 제17조4항에 따라 노동위 조정이 끝난 뒤 합동위원회를 또 거쳐야 한다. 합동위 결정은 구속력을 갖는다. 합동위는 결정에 불복하거나 진행 과정에서 쟁의행위를 한 노조를 없앨 수도 있다. 이로 인한 해고는 정당한 사유로 간주한다. 쟁의행위가 봉쇄돼 있는 것이다.

김형동 변호사(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실장)는 "제도가 헐겁다고 정부가 제도 핑계를 대는 건 기본적으로 헌법수호 의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며 "제도가 잘못됐어도 한국인 노동자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정부가 나서 구제방도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응식 위원장은 "2001년 SOFA를 개정할 때 한국인 우선고용 합의를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고용안정에 대한 한미 양국 간 추가 합의도 가능하다"며 "주한미군에게 고용에 대한 전권이 있다는 말로 한국인 노동자 고용문제를 회피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상자] 아이디얼 스태핑(Ideal Staffing)

주한미군은 2014년부터 교역처를 중심으로 한국인 정규직을 줄이는 대신 파트타임을 늘리고, 한국인 자리를 미국인 자리로 바꾸는 아이디얼 스태핑(Ideal Staffing)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교역처에서 일하는 풀타임 한국인 직원의 비중을 45%에서 20%까지 줄이고, 파트타임은 39%에서 50%로 늘리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할 때만 불러 일을 시키는 수시고용 일자리는 전원 미국인으로 교체하고, 비중도 16%에서 30%까지 확대한다.

이 같은 정책에 기반해 지난해 만든 계획이 이른바 뉴 험프리 스태핑(New Humphrey Staffing)이다. 뉴 험프리 스태핑 계획표를 보면 주한미군은 현재 교역처 푸드코트 정규직 134명을 기지 이전 후 91명으로 줄이고, 파트타임 중에서도 가장 낮은 직급 인원은 95명에서 211명으로 대폭 늘리겠다는 구상이다. 상점에서 일하는 정규직은 221명에서 69명으로 줄인다.

노조는 아이디얼 스태핑 정책이 2001년 SOFA 개정 당시 한미 양국이 체결한 '한국인 고용원의 우선고용 및 가족 구성원의 취업에 관한 양해각서' 위반으로 보고 있다. 양해각서는 각서 발효일(2001년 4월2일) 현재 한국인을 고용하는 것으로 지정된 직위에 대해서는 한국인만을 배타적으로 고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국가안보상 이유가 있는 경우에만 한국인 고용 지정 직위를 미국인 고용 직위로 변경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따라서 국가안보상 이유가 아닌 이상 한국인 풀타임 직원을 절반 이상 줄이고 한국인 수시고용 일자리에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을 앉히는 건 양해각서 위반이 된다.

그런데 주한미군은 "교역처는 양해각서 발효일 당시 한국인 고용원의 우선고용 직위로 지정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한국 정부에 도움을 구했다. 2014년 3월 외교부와 고용노동부에 아이디얼 스태핑 정책이 '한국인 고용원의 우선고용 및 가족 구성원의 취업에 관한 양해각서' 위반인지에 대한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신은 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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