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상신
워크인연구소 연구실장

고등학교 시절, 내가 다니던 학교도 전교조의 불길이 타올랐다. 학교가 마산에 있었던 터라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불씨가 공장을 넘어 학교까지 번진 것이다.

전교조에 가입한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더 열정적이셨고 덜 권위적이셨으며, 무엇보다 학생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전교조 선생님 중에 고전문학 선생님이 딱 그런 분이셨다. 고전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역사적 사실을 섞어 재미있게 가르쳐 주셨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친구가 선생님을 따랐다.

어느 날 선생님 수업시간에 친구 한 녀석이 선생님에게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이 왜 노동자입니까"라고 당돌하게 물었다. 당시 쟁점은 교사가 노동자인가 아닌가였다. 나 역시 그 질문을 하고 싶었다. 노동자는 누나처럼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교사를 노동자라고 하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때 선생님은 노동자에 대한 인식을 바꿔 주셨다.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공이자 사회를 바로 세우는 주체"라고 말하셨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내가 참교육을 실현하는 노동자라는 점이 자랑스럽다"고 하면서 웃으셨다. 그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한 세대가 흘렀다. 그사이 교사는 노동자로 인정받았고 노동조합도 합법화됐다. 그런데 노동자에 대한 인식은 한 세대를 지나도록 크게 바뀐 것 같지 않다. 경향신문이 노동절을 맞아 기획으로 보도한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노동자가 누구인지를 물었더니 63%가 개미, 노예, 불쌍한 사람, 힘든 사람이라고 답했다. 초등학생 눈에 비친 노동자의 모습은 닮고 싶지 않은 대상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직업 1순위는 교사였는데,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했단다.

한 세대가 흘렀건만 학생 눈에 비친 노동자는 여전히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노동자로 살기를 거부한다. 이런 결과는 미국 노사관계 학자 존 버드(John W. Budd)가 노동을 저주(curse)로 정의한 것과 맥이 유사하다. 그는 저서 <노동에 대한 생각>(The Thought of Work)에서 노동의 개념을 10가지로 분류했는데, 첫 번째 개념에서 노동을 저주로 정의했다. 신의 저주로부터 구원받으려는 행위를 노동으로 개념화한 것이다. 노동은 죄를 지은 자가 참회하는 행위이므로 노예와 같은 힘든 직업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노동은 자기를 실현하고(personal fulfillment) 직업적인 시민권(occupational citizenship)을 행사하며, 자기의 정체성(identity)을 찾고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를 형성하는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노동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생존과 자아를 실현하는 인간의 신성한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노동은 인간 행위의 최상의 단계로 평가받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려면 노동조합이 노동교육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노동교육은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동이 실제 발휘되는 현장에서 노동에 대한 가치를 일깨워 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우리 노동교육은 직업이나 직무교육의 틀에서 이뤄지고 있다. 내용은 노동인권에 관한 교육 중심이다. 노동의 가치에 대한 교육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현장 노동교육은 노동조합이 제격이다. 학교를 비롯해 여러 교육기관과 노동조합이 연계해 현장학습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거기에 노동조합이 참여해 노동자의 삶과 노동의 가치를 교육하는 것이다. 노동이 발휘되는 노동과정이나 작업조직을 보고 듣고 체험하며, 어떤 순간에 노동의 보람을 느끼는지를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살아 있는 현장교육 아니겠는가. 이런 교육이 가능할 때 노동을 부끄러워하는 학생이 줄어들 것이다. 나아가 이런 교육생 중에 컨베이어 없이 자동차를 생산하는 생산시스템을 개발하는 인재가 나올지도 모른다.

노동이 부끄럽지 않고 노동자가 행복한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 노동조합과 노동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다.

워크인연구소 연구실장 (imksgo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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