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영 인더스트리올 아태지역 전력네트워크 의장

여러 나라 전력 민영화 정책 추진 과정에서 가장 큰 저항은 해당 노동자들이었으나, 이들 노동자의 저항에 큰 힘을 실어 준 것은 역시 국민의 힘이었다. 불가리아·칠레·아르헨티나·페루 등 여러 나라에서 광범위한 국민적인 저항이 확산되면서 심지어는 정권이 교체되는 상황이 초래되기도 했다.

예외적으로 영국의 경우 공공부문 파업사태가 초래한 불만의 겨울을 겪으면서 민영화 반대여론이 왜곡되기는 했으나 라틴아메리카의 경우처럼 광범위한 국민 저항은 전력산업이 핵심 공공서비스 산업이라는 점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또한 외환위기라는 특수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전의 분할 민영화에 대한 국민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1998년 외환위기 상황은 전력 민영화를 당연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확산시켰다. 한전 화력발전소를 팔면 100억달러가 넘는다는 둥 어느 어느 외국계 전력회사가 한전 발전소에 관심이 있다는 둥 발전소라도 팔아서 빚을 갚자는 보도가 연일 지면을 장식했다.

사실상 전력 민영화는 기정사실화됐다. 정부는 98년 7월 발표한 공기업 민영화 방침에서 전력산업 구조개편 정책을 조기에 확정해 한전의 분할, 민영화 정책을 앞당기겠다고 발표했다. 정부의 정책방향이 결정된 것이다. 당초 전력산업 구조개편 정책은 한전의 경쟁력을 우선으로 해서 장기에 걸쳐 분할 경쟁체제를 구축하는 것으로 방향이 모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 정책방향이 급선회하면서 분할 해외매각을 통한 외환위기 해결책으로 바뀌어 버렸다.

98년 10월 단 한 차례 공청회를 여론수렴 과정으로 하여 99년 1월 전력산업 구조개편 정책이 확정 발표됐다. 한전의 발전소와 송변전, 판매 부문을 분할하고 2002년까지 분할된 전력회사를 민영화해 경쟁체제를 도입하되 최종 단계인 소매경쟁 체제는 2009년까지 완료한다는 것이었다.

정부와 언론을 중심으로 한전 민영화가 기정실화되면서 시민·사회단체 중심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필수 공공서비스인 전력산업을 쪼개 해외에 팔겠다는 정책과 관련해 "농부는 씨나락을 팔지 않는다"는 말로 비유되는 국민적 공감대를 폭넓게 확산시키면서 종교계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결집이 이뤄졌다.

98년 11월 ‘전력산업 분할해외매각 반대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 결성 준비위원회가 구성됐다. 99년 1월8일 명진스님(불교)과 김승훈 신부(천주교), 오충일 목사(기독교) 등 종교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당시 주간노동자신문 발행인이었던 이태복 대표가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범대위가 공식 출범했다.

범대위는 당시 전력노동자 투쟁에 국민이 힘을 실어 주는 계기가 됐고, 대규모 집회와 민영화 반대 1천만인 서명운동, 가두홍보, 종교계와 학계 등 각계 반대성명을 이끌어 내면서 민영화 반대여론을 조성했다. 국민여론이 조성되면서 범대위와 전력노동자 투쟁이 점차 여론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99년 7월 이후 시민·사회단체가 대거 참여하면서 범대위는 확대 재편됐다. 범사회적인 민영화 반대투쟁이 본격화한 것이다. 같은해 11월에는 전력 민영화에 반대하는 105만명의 국민 서명을 받아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개신교를 필두로 불교계·천주교계·학계의 민영화 반대 성명서가 발표됐다. 이들은 국회 산업자원위원장을 방문해 민영화 관련 법률안 처리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이에 힘을 받은 전력노동자들은 전력 관련 산업뿐만 아니라 양대 노총의 지원을 받으면서 민영화 반대투쟁을 지속했다. 법안처리가 임박한 99년 12월께에는 명동성당에서 무기한 농성을 진행하면서 국회를 압박했다.

99년 1월 민영화 추진을 확정한 전력산업 구조개편 정책이 발표된 뒤 1년여 동안 전력노동자들의 투쟁과 시민사회가 결합한 범국민적인 반대여론은 그해 12월 관련 법률안 처리를 막아 냈다. 회기종료와 함께 법안을 자동폐기하는 성과를 거뒀다.

전력노동자만의 민영화 반대투쟁이 자칫 밥그릇 지키기로 인식될 수 있는 상황에서 종교계와 시민사회가 결합함으로써 노동자 투쟁에 힘을 실어 줬고, 국민의 반대여론도 이끌어 낸 것이다. 아울러 외환위기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자칫 전력산업이 헐값으로 해외자본에 매각될 수 있었는데, 국민과 노동자의 힘으로 이를 막아 냈다. 막대한 국익손실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전력산업 분할 민영화와 경쟁체제 재편은 진행형이다. 이에 반대하는 시민사회의 활동 또한 지속돼 왔다. 단지 노동자들만의 투쟁이었다면 정부의 정책추진을 막아 내는 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광범위한 국민의 힘이 급진적인 전력 민영화를 막아 내는 동인이 됐다는 점에서, 앞으로 추진될 전력 민영화 과정에서 국민 여론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국민과 국가를 위한 합리적 정책 결정이 이뤄지기를 소망해 본다.

인더스트리올 아태지역 전력네트워크 의장 (peoplewin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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