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일 옥시레킷벤키저노조 및 영업지부 조합원들이 여의도 본사 앞에서 사측의 부당노동행위 등을 규탄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배혜정 기자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영국계 기업 옥시레킷벤키저가 1년 계약직 생활을 거쳐 정규직으로 전환한 노동자를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해고해 논란에 휩싸였다.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회사가 안 지 열흘 만에 단행된 해고여서 부당노동행위 의혹이 일고 있다. 옥시는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을 일으킨 핵심 업체다. 현재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데, 법적 책임을 피하려 기존 법인을 청산하거나 인체 유해성을 조직적으로 은폐·조작한 정황이 드러났다.

18일 <매일노동뉴스> 취재 결과 옥시는 올해 1월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직원 ㅂ씨에게 "평가가 안 좋다"며 최근 채용취소를 통보했다. ㅂ씨는 5년 경력을 쌓고 옥시에 입사한 뒤 1년 계약직을 거쳐 정규직으로 전환된 노동자였다. 옥시는 그에게 난데없이 '3개월 수습' 딱지를 붙여 채용을 취소했다. 옥시레킷벤키저노조 영업지부와 ㅂ씨는 "노조 가입에 대한 보복성 해고"라고 반발하고 있다.

◇아무도 몰랐던 3개월 수습기간=ㅂ씨는 5년을 다닌 제약회사를 그만두고 지난해 1월 옥시에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병원 영업을 하는 마케팅부서에 배치됐다. 스트렙실·개비스콘처럼 제약업계에서 주목하는 제품을 파는 회사라 성장잠재력이 있다고 봤다. 점점 커지고 있는 일반의약품(OTC) 시장도 매력적이었다. 옥시크린·파워크린 같은 생활용품을 주로 판매하던 옥시는 2009년 말부터 OTC를 비롯한 헬스케어 시장에 뛰어들었고, 2014년부터 사업 확장에 나섰다.

영업경험(메디컬세일즈)이 많은 경력직원이 필요했던지, ㅂ씨 외에도 경력직 2명이 더 채용됐다. 채용 당시 회사는 계약직으로 1년 일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2015년 12월1일 ㅂ씨는 마케팅부서에서 약국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OTC 부서로 발령이 났고, 한 달이 지난 올해 1월5일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그런데 지난달 31일 일이 터졌다. 부장(매니저)의 호출을 받고 A이사를 만난 ㅂ씨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았다. A이사는 "수습기간 종료 시점이 돼 평가를 해 보니 애티튜드(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트집을 잡았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상황판단력이 떨어진다"거나 "상사와 커뮤니케이션이 안 된다" 혹은 "조직 내 융합이 안 되고, 회사에서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불과 열흘 전만 해도 A이사는 "평가가 나쁘지 않다"고 칭찬했던 터였다. ㅂ씨는 당황스러웠다. 그는 "언제는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더니, 열흘 만에 해고하겠다고 말을 바꿨다"며 "어이가 없었다"고 토로했다.

ㅂ씨는 자신이 '수습직원'이었다는 사실도 그날 처음 알았다. "내가 왜 수습직원이냐"는 ㅂ씨의 물음에 A이사는 영문으로 작성된 근로계약서를 보여 줬다. 올해 1월 정규직으로 전환했을 때 서명했던 근로계약서였다.

근로계약서에는 "처음 3개월은 수습(프로베이션) 기간으로 두고, 정규직 전환시 퍼포먼스(실적)·애티튜드(태도)·퀄리티(자질)를 평가해 적절치 않거나 충분치 않을 경우 수습기간을 연장하거나 해고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ㅂ씨는 "근로계약서를 쓸 때는 눈여겨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문제 많은' 근로계약서를 그저 훑어보고 서명한 것은 아무도 수습기간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근로계약서에 수습기간이 있었다는 걸 회사 직원 누구도 몰랐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A이사도 면담 과정에서 ㅂ씨에게 "나도 (당신이) 수습인지 몰랐다"고 말했다. ㅂ씨는 "회사에서 누구도 수습기간이 있다는 사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고, 수습기간 동안 평가를 어떤 식으로 할 것이라는 말도 없었다"며 "수습을 거쳐야 한다는 조건을 알았다면 근로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A이사와 인사담당자는 ㅂ씨에게 "레퍼런스(평판)를 생각해서 사직서를 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ㅂ씨가 거절하자 나흘 뒤인 이달 4일 회사는 채용취소를 통보했다.

◇'노조 가입' 알고 열흘 뒤 해고=회사가 아무도 몰랐던 수습기간을 꼬투리 잡아 ㅂ씨를 해고한 이유는 무엇일까. ㅂ씨는 "노조에 가입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ㅂ씨는 지난달 22일 면담에서 A이사가 했던 말이 걸렸다. "너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으니까 열심히 일하라"고 했던 그날 A이사는 그에게 노조 가입 사실을 물었다.

ㅂ씨는 올해 2월24일 노조 영업지부에 가입했다. 함께 일하는 OTC 부서 팀원들이 모두 조합원이란 얘기를 듣고 자연스럽게 가입원서를 썼다. 노조 가입 사실을 매니저에게 말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A이사가 자신을 불러 노조 가입 여부를 물어 내심 놀랐다고 했다.

당시 A이사는 ㅂ씨에게 "전무님한테 (당신이) 노조에 가입했다는 얘기를 들어 놀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조 가입은 자유의사"라며 "노조에 가입했다고 업무를 해이하게 하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ㅂ씨는 "그렇게 말하는 A이사가 '쿨'해 보였다"고 했지만 결과는 쿨하지 않았다.

ㅂ씨가 가입한 영업지부는 지난해 7월 설립됐다. 본사 관리직과 영업직 간 임금차별, 인력부족에 따른 노동강도 강화로 불만이 쌓였다. 그전에도 노조설립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고 한다. 그러다 지난해 "영업직을 아웃소싱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고용불안을 느낀 직원들이 모였고, 익산공장 생산직 노동자들이 주축인 노조에 가입해 영업지부를 만들었다.

지부 관계자는 "영업지부가 생기자 회사가 민감하게 반응했다"며 "회사 법무팀을 동원해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고 있다"고 귀띔했다. 회사가 영업지부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상황에서 ㅂ씨가 지부에 가입하자 본보기로 퇴출시킨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배경이다.

◇"부당해고·부당노동행위"=ㅂ씨는 조만간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낼 계획이다. 그는 "수습이 있었는지도 몰랐다던 A이사가 어떻게 3개월 수습기간 업무를 평가했다는 것인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ㅂ씨 사건을 대리하고 있는 지석만 공인노무사(노무법인 노동119)는 "ㅂ씨는 영업실적도 좋았고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과장 승진까지 했다"며 "해고할 만한 다른 요소가 없는 상황에서 노조에 가입하자마자 해고했기 때문에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지 노무사는 "ㅂ씨가 계약직으로 일한 기간에 직무평가를 했고, 그에 따라 정규직으로 전환했는데 또다시 3개월 수습기간을 둔 것은 위법하다"고 말했다.

김기덕 변호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는 "인사담당자들이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다고만 하고, 수습기간을 고지하지 않았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며 "근로계약서에 수습기간이 정해져 있더라도 정확히 근로자에게 고지하지 않았다면 근로계약서 자체는 효력이 없다"고 설명했다.

"회사는 다른 회사를 가려면 레퍼런스를 생각해 사직서를 내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구요. 사직을 하는 순간 모든 책임은 저한테 오는 거잖아요. 정당하지 못한 이유로 잘렸는데, 왜 내가 그 책임을 져야 하나요?" ㅂ씨의 하소연이다.

한편 <매일노동뉴스>는 사실관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회사 인사담당자들에게 수차례 전화했지만 끝내 답변을 듣지 못했다. 다만 최근 임금·단체교섭에서 노조가 "ㅂ씨에 대한 채용취소는 부당해고·부당노동행위"라고 항의하자 회사는 "ㅂ씨에게 명백하게 해고사유가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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