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총 조직교육국장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 있는 지하철 안의 사람들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옴짝달싹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용케 휴대전화로 기사를 검색하는 이도, 눈을 감고 흔들리는 차 안에 몸을 맡긴 사람도,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는 승객들 모두 표정이 없었다. 어제와 다름없는 만원 지하철 안에서 출근을 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똑같았다. 4·13 총선 결과 여당이 참패하고 야당이 12년 만에 제1당이 된 아침 출근길의 모습이다.

지난밤 나는 개표방송을 지켜보며 오만하고 무능한 여당을 심판했다는 짜릿함과 통쾌함을 느꼈다. 과반은 기본이고 180석, 200석까지 예상됐던 공포에서 벗어난 그 기분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감정 뒤로 슬며시 들어오는 허전함이 있었다.

나는 출근길 노동자들의 얼굴 속에서 공허함의 이유를 발견했다. 최선을 찾기보다는 최악을 막기 위한 선거, 희망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심판을 먼저 해야만 했던 투표의 결과는 내게 절반의 만족을 전해 줬다.

길게는 8년, 짧게는 4년 동안 보여 준 새누리당의 패악질은 심판받아 마땅했다. 세월호 참사에서 보인 반인륜적인 모습과 국사교과서 국정화와 한일 위안부 협의에서 보여 준 반역사적인 행태, 청년일자리와 쉬운 해고 등에서 드러난 반노동정책 등 그들의 과오를 돌이켜 보면 오히려 그들은 이번 선거에서 분에 넘치는 의석을 가지고 갔다.

기분은 풀리고 8년 묵은 체증이 내려갈지는 몰라도 여당 심판이 현재와 미래의 내 삶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원내 1당이 된 더불어민주당과 3당 체제를 만들어 낸 국민의당이 우리의 삶을 나아지게 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하나의 예로 두 당이 갈라서기 전이었던 새정치민주연합이 세월호특별법 협상 과정에서 보여 준 태도와 실력은 부족함이 넘쳐났다. 노동정책에 있어서도 더불어민주당은 좋은 답안지를 적어 냈지만 이를 실현시킬 능력과 의지에 물음표가 붙어 있으며, 국민의당 답안지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정의당과 녹색당·노동당이 받은 성적표도 이번 총선에서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이러한 절반의 성과가 출근길 노동자들의 무표정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16일은 세월호 참사 2주기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념행사가 열린다. 나는 투표로 채우지 못한 나머지 절반의 희망은 광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말한다. 2년이나 지났으면 이젠 그만해야 할 때가 아니냐고. 그러나 진실이 인양되지 못하고, 바뀌어야 할 제도는 그대로 있으며, 처벌받아야 할 대상들이 버젓이 군림하고, 위로받아야 할 사람들이 여전히 찬 바닥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 기억을 위한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4·3 제주가 그러했고, 5·18 광주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서울 은평갑에서 당선된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 후보는 당선소감을 통해 "제주 강정마을과 쌍용자동차 사태, 세월호 참사 등 현장에서 느낀 문제점을 개선하는 노력을 하고 싶다"며 "여러 가지 제한과 한계 속에 묶어 둔 세월호 특별법을 개정하겠다"고 말했다.

박주민 당선자와 같은 선량들이 국회에서 노력할 때, 우리는 광장에서 외쳐야 한다.

그렇게 서로가 함께 남은 부족함을 메워 나간다면 다음 선거는 희망을 바탕으로 최선을 선택하는 환경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나는 기대한다.

한국노총 조직본부 교육국장 (labor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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