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

최근 소득주도 성장(income-led growth) 담론 확산과 저임금층 생활수준 향상, 불평등 완화, 소득분배 개선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 확대 등과 맞물려 많은 국가들이 최저임금 인상 압력을 받고 있다. 미국 몇몇 주에서는 최저임금을 2021년에서 2022년까지 15달러로 인상하기로 결정했고, 한국에서도 집권 여당이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시간당 8천~9천원으로 끌어올리(는 효과를 내)겠다는 공약을 내기도 했다.

영국도 예외가 아니다. 최저임금 액수를 상향했다. 이뿐 아니다. 법정최저임금제를 넘어 법정생활임금제(National Living Wage)를 도입했다. 파격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펴는 대표적인 나라에서 ‘생활임금’을, 그것도 법적 구속력(legally enforceable)을 갖는 제도로 도입했다는 이유에서다. 생활임금은 시장이 감당할 수 있는 최저선이 아닌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임금을 설정하자는 취지로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캠페인을 통해 확산된 개념이다. 지방자치단체가 조례로 제정하거나(한국·미국), 캠페인 단체들이 제시한 수준을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준수하는(영국) 방식으로 생활임금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영국의 ‘법정’최저생활임금제 도입은 획기적인 시도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긍정적 의미의) 파격’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인상률 측면이다. 올해 4월1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법정생활임금은 시간당 7.20파운드(약 1만1천700원)다. 정부는 2020년까지 이를 중위임금(median earnings)의 60%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인데, 액수로는 약 9파운드다. 현재 생활임금재단(Living Wage Foundation)이 주도하는 캠페인에서 제시한 생활임금과 견줘 보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재단이 제시한 2016년 생활임금은 법정생활임금보다 1파운드 이상 높은 시간당 8.25파운드(약 1만3천148원)다. 물가가 상대적으로 높은 런던의 생활임금은 9.40파운드(약 1만5만288원)다. 어떠한 법적 구속력이 없는 이 캠페인에 이미 FTSE 100(런던증권거래소 상장 우량주식) 기업, 지방정부 등 2천300여개 기업이 참여해 자발적으로 생활임금을 지급하고 있다. 또한 중위임금 60% 달성 계획도 획기적이라고 평가하기 어렵다. 법정최저임금이 도입됐던 1999년 최저임금이 중위임금의 46% 수준이었다가 지난해(6.70파운드, 지난해 10월부터 적용) 중위임금의 55%로 꾸준히 증가해 왔다.

둘째, ‘생활’임금이라는 그 ‘이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의 측면이다. 캠페인에서 제시된 생활임금은 기본 생활비(real cost of living)에 소득분배 수준을 함께 고려한 것이다. 이에 비해 최저임금은 생활에 필요한 비용보다는 시장이 견딜 수 있는 수준에서 결정돼 왔다. 이름을 생활임금으로 바꾼다고 해서 이러한 철학의 변화가 동반될지는 의문이다. 그런 데다 법정생활임금제는 25세 이상자에만 적용된다. 25세 미만자는 기존 최저임금제의 적용을 받는다.

그런데 자발적인 생활임금 캠페인에 동참한 기업들은 연령과 관계없이, 직접고용뿐 아니라 간접고용 노동자들에까지 생활임금을 지급해 오고 있다. 때문에 법정생활임금제가 이름만 바꾼 최저임금(rebranded minimum wage)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셋째, 가장 중요한 측면은 생활임금제와 사회복지와의 상관관계다. 영국 정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법정생활임금제 도입은 ‘낮은 임금, 높은 세금, 높은 복지수준’에서 ‘높은 임금, 더 낮은 세금, 더 낮은 복지수준’으로의 전환이라는 정부 정책기조를 실현하는 핵심 수단 중 하나다. 영국 정부는 법정생활임금제가 사회보장시스템을 통해 (시장에서 결정되는) 임금에 더해 소득을 보전해 왔던 정부의 부담, 정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동안 ‘생활임금’ 논의가 주로 앵글로색슨 국가에서 제기됐던 이유 중 하나는 임금이 주로 시장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이를 사회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인데, 영국 정부의 시도는 시장 기능에 더 의존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때문에 법정생활임금제는 도입됐지만 사회복지 혜택 축소와 맞물려 저임금층 생활수준은 더욱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정부는 생활임금제 시행에 따라 올 한 해 180만명의 근로자들이 임금인상 효과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지만 사회복지 혜택 축소분을 감안하면 실질 생활수준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국 재정연구소(IFS) 분석에 따르면 2019년까지 정부가 이미 계획한 복지축소 정책이 집행될 경우 저임금층 가구는 생활임금제에 의해 연간 198파운드를 더 받게 되지만 연간 754파운드의 사회복지 혜택 축소를 경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연간 556파운드를 삭감당하게 된다. 2명 이상의 자녀가 있는 저소득층은 더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측면에서 볼 때 영국의 법정생활임금제 시행을 단지 최저임금 인상을 통한 저임금층 생활수준 향상과 불평등 해소의 긍정적 신호로만 보기 어렵다. 또한 영국의 경험은 단지 최저임금 액수 자체만이 아니라 세제 및 사회복지 정책과의 연계 속에서 저임금층의 실질 생활수준 향상을 논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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