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탁 노동자 송복남(55)씨는 지난해 노조활동 보장을 촉구하며 부산시청 광고탑 위에서 무려 253일간 고공농성을 벌였다. 하지만 노사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현장에는 신규노조가 설립돼 교섭권을 행사하고 있다. 민주노총

4·13 총선이 코앞이다. 총선이 끝나면 국회의원 300명이 새로 배출된다. 총선 결과에 따라 노동자 삶도 요동친다. 정당과 후보가 내건 공약은 그 진폭의 기준이 된다. 아쉽게도 20대 총선 노동공약은 양과 질에서 19대 총선에 못 미친다.

노동자들이 목숨을 끊고, 하늘에 올라도 쟁점이 되지 않는 현실이다. 정치권 보수화 경향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할 것은 하고, 요구할 것은 요구해야 한다.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야 두말해 무엇하랴. <매일노동뉴스>가 총선 후보자들에게 20대 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해야 할 5대 노동의제를 제안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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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 순서]

1. 노동시간단축 먼저
2. 비정규직 임금 올려야
3. 노동자 이름표를 달자
4. 아프지 않고 일할 권리
5. 쉽게 노동조합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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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을 만들어 사용자를 상대로 교섭을 하거나 교섭이 결렬돼 쟁의행위에 나선 노동자들에게 “왜 노동조합을 만들었는가?”라고 물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대체로 일치한다.

“더 이상 당하고만 살 수는 없다.”

여기 두 명의 노동자가 있다. 희망퇴직 요구를 거부했다가 회사로부터 ‘면벽(面壁) 징계’라는 경악스러운 괴롭힘을 당한 경남 창원 두산모트롤 노동자 이아무개(47)씨와 “일한 시간만큼 임금을 달라”고 요구하며 2년 넘게 길거리에서 파업투쟁 중인 부산 생탁 노동자 송복남(55)씨다. 노동조합은 어느 날 갑자기 이들의 삶에 끼어들었다.

당신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두산모트롤 사무직 노동자인 이씨는 여태껏 살면서 노동조합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감히 갈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어지간해서는 사무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가입하겠다고 마음먹기가 쉽지 않아요. 상사들이 매기는 인사고과에 따라 승진 여부가 달라지고, 상사 눈 밖에 나면 해고 대상이 될 수 있으니까요. 노동조합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겁니다.”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이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마지막 수단’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회사가 대규모 인수합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구조조정이 예상될 때 노동조합이 만들어진다. 노동자들은 생명보험에 가입하는 심경으로 노조가입서에 서명한다. 아니면 이씨처럼 회사로부터 강력한 퇴사 압박을 받으면 “잘릴 때 잘리더라도 한번 싸워나 보자”는 심정으로 노동조합 문을 두드린다.

“회사는 저에게 업무를 주지 않고 하루 종일 벽만 바라보게 했어요. 컴퓨터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전화통화도, 책을 읽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금지했어요. 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려 찾아왔던 동료들은 임원실에 불려가 질책을 들었습니다. 너무 참담했어요. 그런데 노동조합은 달랐습니다.”

이씨가 가입한 금속노조 두산모트롤지회 조합원들은 대부분 기술직 노동자다. 사무직인 이씨와는 안면도 없는 사이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동료조차 이씨를 피하던 그때 지회 조합원들은 친구를 자처했다. 사내에서 만나면 인사를 걸어 주고, 격려의 말을 담은 문자메시지를 보내 주고, 함께 밥을 먹자고 손을 내밀었다. 이씨는 “노동조합은 고립무원 상태에서 내가 버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힘이었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두산모트롤의 '면벽 징계'라는 기괴한 행위가 언론에 대서특필되자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비인격적 인사관리로 물의를 빚고 있는 기업에 대해 근로감독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회사측이 어떻게 반응했을지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회사측은 “중앙노동위원회에 올라가 있는 부당대기발령 구제신청을 취하하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이씨를 회유했다. 이씨는 이를 거부하면서 “노조 지회장을 면담에 참여시키고, 모든 사안을 지회와 협의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회사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씨가 노동조합 문을 두드린 뒤 회사의 ‘슈퍼 갑질’ 행태가 노사문제로 비화되고 공식화됐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씨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대기업 직원인 데다 조직력이 강한 금속노조 지회가 설립된 사업장 소속인 이씨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교섭에 이르기까지 “피눈물이 난다”는 고통의 과정을 겪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영세업체에 근무하는 노동자나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 설립이나 가입은 언감생심이다. 누구보다 노동조합의 보호가 필요한 사회적 약자인 이들에게 노동조합으로 향하는 길은 지독한 역설이다.

영세업체 노동자의 ‘피눈물’로 쓴 노조설립 이야기

부산 향토막걸리 제조업체 생탁(부산합동양조)에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벌어진 막무가내 착취와 탄압은 대한민국이 과연 법치국가인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갖게 한다. “노동조건이 열악하다”는 말조차 사치스럽다.

송복남씨는 생탁 장림공장에서 만들어진 막걸리를 운송하는 배달운전기사였다. 새벽 4시에 출근해 정오에 퇴근했다. 버스가 다니지 않는 새벽시간에 출근하는데도 회사는 교통비로 딱 버스비만 줬다. 새벽 4시부터 6시까지는 심야근무수당이 적용되는 시간인데, 회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수당을 주지 않았다. 주 5일 근무는 꿈도 못 꿨다. 한 달에 하루만 쉬었다. 상시적으로 주말특근이 이뤄졌지만 이 역시 수당을 받지 못했다. 노동자가 일을 하다 다쳐도 회사는 나 몰라라 했다.

“아침과 점심을 회사에서 해결해야 하는데 회사가 한 끼당 책정한 식대보조비가 450원이었어요. 껌 한 통 값도 안 되는 돈으로 식사를 하라니…. 일요일엔 회사 식당마저 문을 안 엽니다. 식당 아주머니가 직원들 먹으라고 삶은 고구마 한 개 또는 삶은 계란 한 개를 나눠 주고 갔어요. 딱 한 개.”

생탁은 1970년대 부산에 소재한 양조장들이 모여 만든 회사다. 사장만 41명이다. 생탁이 2014년 부산지방노동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연매출액 중 34.4%가 사장단 배당금으로 지출됐다. 사장 1명이 매달 2천만원이 넘는 거액을 받아 간 셈이다. 반면 연매출액에서 노동자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0%에도 못 미쳤다.

송씨를 비롯한 생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기로 결심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회사측이 사규를 바꾸겠다며 사규집 한 부를 회사 식당에 두고 간 것이 발단이었다. 그 안에는 “연차휴가를 쓰지 않으면 소멸된다”는 조항이 있었다. 연차휴가는커녕 일요일에도 제대로 쉬어 본 적 없는 노동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왜 우리는 연차를 쓰지 못하냐. 못 쓰면 수당이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니냐. 이렇게 항의했죠. 그랬더니 회사측 말이 ‘포괄임금제라 이미 월급 안에 수당이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송씨를 비롯한 5명의 배달운전기사들은 그길로 민주노총 부산본부를 찾아갔다. 노동법 상담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를 계기로 2014년 1월 부산일반노조 부산합동양조 현장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교섭창구 단일화는 누굴 위한 제도인가”

하지만 게임은 너무 쉽게 끝이 났다. 제2노조가 만들어지고, 기존노조 조합원들은 신규노조로 갈아타기 시작했다. 기존노조에서 위원장(현장위원장)을 했던 인물이 제2노조 설립을 주도했다. 소수노조로 전락한 기존노조는 이듬해 제2노조에 교섭권을 빼앗겼다. 이 과정에서 사측의 지배·개입이 있었으리란 사실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민주노조를 와해하기 위해 회사노조 설립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복수노조 제도를 악용한 사업주들을 너무 많이 봐 온 탓이다.

송씨는 지난해 노조활동 보장을 촉구하며 부산시청 광고탑 위에서 무려 253일간 고공농성을 벌였다.

“노동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법이 달리 뭐가 있겠어요. 밥을 굶거나 고공농성에 나서야 언론이 관심을 가져 주잖아요.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아요. 일한 시간만큼 임금을 달라는 요구를 하려는 것뿐인데, 그것조차 못하게 가로막는 제도와 사회가 원망스럽습니다. 도대체 교섭창구 단일화는 누구 좋으라고 만든 제도인가요? 소수노조라는 이유로 정당한 목소리마저 차단해 버리는 제도라면 당연히 뜯어고쳐야 하는 것 하는 것 아닌가요?”

송씨는 서병수 부산시장의 중재약속을 받고 농성을 접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달라진 것은 없다. 정치권은 무서울 정도로 노동자들의 외침을 외면했다. 노동자들이 파업농성을 벌인 생탁 장림공장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지역구 의원 사무실이 있다. 새누리당으로 당적을 옮긴 조경태 의원이다. 그는 노동자들의 파업현장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지역구 의원만이라도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을 수도 있다. 정치가 민생을 외면할 때 국민이 겪는 고통이 크기가 커지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노조 하기 쉬운 나라가 좋은나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4년 말 현재 우리나라 노조조직률은 10.3%다. 2012년부터 3년 연속 같은 수치다. 조직률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직후 전 사회적인 노동조합 결성 분위기에 힘입어 89년 19.8%까지 올랐으나 이후 지속적인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2010년 9.8%로 사상 처음으로 10% 벽이 무너지기도 했다. 지금은 10%대 초반을 유지하고 있다. 노동자 10명 중 9명이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의 노조조직률 순위를 보면 우리나라가 꼴찌에서 네 번째(31위)다. 2011년 사업 또는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 제도가 시행된 뒤에도 조직률은 반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씨와 송씨의 사례는 우리나라 노조조직률이 왜 이토록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기왕에 노조가 설립된 사업장이라고 해도 노동자들은 사용자에게 찍히는 것이 두려워 노조 가입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 용기를 내어 노동조합을 설립하더라도 회사가 어용노조를 내세워 노노갈등을 조장하면 그만이다.

충남 아산의 자동차 부품업체 갑을오토텍이 퇴직 경찰과 특공대 출신 ‘용병’을 고용해 복수노조를 만들고, 이들로 하여금 기존노조 조합원에게 폭행을 휘두른 다음 기존노조를 무력화한 사건은 사용자의 노조 혐오주의와 복수노조 제도가 결합해 빚어낸 최악의 결과였다.

어디 그뿐인가. 전세버스업체 제로쿨투어에 노조가 만들어지자 “내가 얼마나 독한 놈인지 보라. 노조 조합원은 칼질해서 (다) 정리하겠다”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퍼부어 대던 회사측 관리자가 제2노조 설립을 주도한 것도 모자라 노조간부까지 맡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나라에서 '노조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피부에 와 닿지 않나.

사정이 이런데도 정치권은 노동조합 문제에 관심이 없다. 새누리당·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이 4·13 총선을 앞두고 내놓은 공약집에는 노동기본권에 관한 내용이 하나도 포함돼 있지 않다. 집권여당인 새누리당과 정권교체를 표방하는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노동기본권 공약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느 당이 선거에서 이기든, 또 어느 당이 정권을 차지하든 노조활동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노동문제 전문가들은 “노동정책의 출발점은 노조조직률과 단체협약 적용률을 확대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노조 하기 쉬운 나라, 노조로부터 보다 많은 노동자가 보호받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정치권이 정치적 수사로 외치는 경제민주화의 핵심적인 고리는 임금격차 완화다. 이는 노동운동이 활성화돼야 가능한 얘기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노동절 대국민 연설에서 “내 가족의 생계를 보장하는 좋은 일자리를 원하는가. 누군가 내 뒤를 든든히 봐주기를 바라는가. 나라면 노조에 가입하겠다”고 말했다.

20대 국회가 민생국회로 거듭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자명하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기본권에 대한 진지한 질문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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