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아파 잠을 잘 수 없었다. 잠이 들더라도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모르는 사람에게 쫓기고, 사람을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는 꿈을 꿨다. 칼로 팔다리가 잘리는 악몽에도 시달렸다. 아이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죽고 싶다는 생각에 아파트 20층 옥상에 올라가 뛰어내릴까 고민한 적도 있다. 어떨 땐 내가 왜 옥상에 올라와 있는지,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출근길 회사 정문까지 갔다가 머리와 가슴이 터질 것 같고 견딜 수 없이 피부가 따갑게 느껴져 집으로 되돌아온 적도 있다.”

중증 우울증을 겪어 온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 조합원 김아무개(39)씨가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요양 신청을 내면서 대리인을 통해 증언한 내용이다. 공단은 2011년 5월 이후 지속되고 있는 유성기업 노사갈등이 김씨의 상병을 유발했다고 보고 산재를 인정했다.

3일 유성기업지회에 따르면 김씨는 입사 10년째인 2013년 중순쯤부터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파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던 김씨는 갈수록 난폭한 성격으로 변해 갔다. 하루에 두통약을 다섯 알씩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머리가 멍해지고 동료들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지난해 1월 병원을 찾았다가 ‘중증의 우울증 및 적응장애’ 진단을 받았다.

김씨는 근로복지공단 천안지사에 산재요양 신청을 냈다. 천안지사는 그러나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판단을 근거로 산재 불승인 결정을 했다. 질병판정위는 “업무상 스트레스 상황이 이해는 되지만, (2011년) 노사갈등 사건이 발생한 후 시간이 많이 지났다”며 “신청인의 증상과 업무 간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아 업무 관련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김씨는 결국 공단 본부에 재심을 신청했다. 불승인처분 취소 청구를 맡은 공단 산재심사실은 천안지사와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산재심사실은 “김씨는 사업장의 극심한 노사분규와 노노 갈등의 상황으로 스트레스와 정신적 고통을 받아 왔다”며 “김씨의 상병이 업무와 관련 없는 개인적 요인에서 비롯됐다고 하더라도, 노사 대립이라는 업무상 스트레스가 상병의 주된 발생원인과 겹쳐 상병이 유발된 만큼 업무와 상병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이어 “김씨의 경우 가정문제나 금전문제 같은 개인적 소인이 전혀 없었는데도 업무와 관련성이 낮다고 판단한 천안지사의 불승인 처분은 부당하다”고 덧붙였다.

충남노동인권센터가 지난해 유성기업 아산·영동공장 노동자 26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3.3%가 우울증 고위험군으로 나타났다. 유성기업에서는 김씨 외에 4명의 노동자가 정신질환으로 산재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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