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유명한 진상고객이 매장에 나타나면 심장이 뛰기 시작합니다. 아 제발, 우리 매장에 오지 않았으면. 물건 안 사도 좋으니까 나에게만 오지 않았으면. 불안한 눈빛으로 떨고 있으면 손님이 한마디 하죠. '야 너 눈빛이 왜 그따위야? 백화점에서 잘리고 싶냐?'고 말입니다."

20년 넘게 서울시내 유명백화점 명품화장품 코너에서 손님을 상대한 베테랑 여성노동자 얘기다. 이른바 진상고객으로 불리는 블랙컨슈머와 위장고객을 뜻하는 미스터리쇼퍼의 감시 속에 마음의 병이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실제로 화병 진단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매일노동뉴스>와 서비스연맹이 '백화점의 얼굴'이라는 1층 화장품매장에서 고객들을 상대로 고급브랜드 화장품을 파는 노동자들의 감정노동실태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지난 29일 오후 서울 영등포 서비스연맹 회의실에서 열린 이날 좌담회에는 이은희 로레알코리아노조 위원장과 김성원 부루벨코리아노조 위원장·김연우 시세이도노조 위원장·전하영 엘브이엠에이치노조 위원장·김명신 엘브이엠에이치노조 부위원장·유성규 공인노무사가 토론자로 참석했다. 박성국 매일노동뉴스 대표이사가 좌담회 사회를 맡았다.

"손님이 무섭다"

사회 : 총선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서비스유통업체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감정노동 실태를 공유하고 법·제도적 대책이 필요한 대목이 무엇인지 듣기 위해 오늘 자리를 마련했다.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생생하게 들려 달라.

전하영 : 화장품 판매는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브랜드마다 판매매뉴얼이 있다. 화장품을 사든 안 사든, 직원들은 고객을 상대로 적어도 30분 이상 이야기를 해야 한다. 어떤 각도로 고객을 바라봐야 하는지, 인사는 몇 도로 해야 하는지 정해진 매뉴얼에 따른다. 보통 인사는 두 마디로 한다. “안녕하십니까. 어서오십시오”처럼. 요즘은 스몰토크라고 해서 친근감을 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날씨가 좋죠?” “비가 오는데 어디 젖지는 않으셨나요?” “오늘 헤어스타일이 너무 좋으시네요.”

고객의 환심을 사야 한다. 그 다음에 고객이 필요로 하는 제품을 찾아 피부타입에 따라 설명을 하고, 고객에게 직접 발라 주면서 반응을 살핀다. 손님이 나가실 때는 향수를 뿌려 드린다.

사회 : 30분 단위로 한 명의 손님을 응대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하루에 총 몇 명의 손님을 상대하게 되나.

김성원 : 우리 회사는 면세점에서 화장품과 명품백을 판매한다. 공항 면세점의 경우 고객들이 원하는 제품을 빨리 구매한 뒤 비행기에 탑승해야 하기 때문에 빠른 시간 안에 구매행위가 이뤄진다. 바쁜 날은 직원 한 명이 하루에 50명 정도의 손님을 맞는다. 이 얘기를 하면 다들 놀라던데. 고객이 오시면 우리 직원들이 가방을 보여 주면서 고객이 직접 가방을 들어 보도록 한다. 그러면 주변을 지나던 또 다른 직원이 “고객님 너무 잘 어울리세요”라고 말하며 지나간다. 그렇게 교육을 받는다. 예를 들어 어떤 손님이 구두를 사려고 하면, 지나가던 직원이 “고객님 지금 입고 계신 의상하고 신발이 너무 잘 어울리세요”라고 말한다. 이른바 크로스세일 전략이다. 직원들은 각 제품에 어울리는 또 다른 제품에 관해 미리 교육을 받는다.

전하영 : 우리가 속한 회사 매뉴얼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에겐 백화점이 갑사인데, 각 백화점 판매매뉴얼이 따로 있다. 백화점은 미스터리쇼퍼라고 불리는 위장고객을 보내 백화점에 들어와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제시한 매뉴얼을 준수하는지 감시한다. 손님을 응대하는 것도 벅찬데 사방에서 감시를 받는 셈이다.

사회 :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판매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노동자들의 평균연령과 근속연수가 어떻게 되나.

전하영 : 근속 3년차 미만이 수두룩하다. 아니면 30대 중반 이후 장기근속자다. 중간이 없다. 요즘 입사하는 젊은 친구들은 대학에서 메이크업을 전공하거나 관련 자격증을 취득한 상태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자부심을 갖고 입사한다. 그런데 일에 지쳐 나가떨어진다. 20대 초반에 입사해 20대 중반이 되면 회사를 나간다. 이직률이 굉장히 높다.

▲ 정기훈 기자


"3년을 못 버티고 떠난다"

유성규 : 백화점 노동자들은 주말과 휴일에 집중적으로 근무를 한다. 그 어느 직종보다 일과 가정을 양립하기 어렵다. 다른 사람들이 쉴 때 일을 하다 보니 가사와 육아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높은 이직률은 이 같은 근무형태와 연관성이 높다.

전하영 : 휴무일이 들쭉날쭉이다 보니 생체리듬이 완전히 무너진다. 우리는 명목상 하루 8시간 일하지만 2시간은 고정적으로 초과근무를 한다. 그런데 실제 근무시간은 하루 12시간이 넘는다. 가족과의 유대관계가 약해지기 마련이다. 애들이 잠들어 있을 때 출근하고, 잠들 때 퇴근한다. 우리 아이한테 엄마라는 존재가 있기는 할까.

이은희 : 보통 백화점 폐점시간이 저녁 8시에서 8시30분 사이다. 최근에는 점점 폐점시간이 늦춰지는 추세다. 매출압박을 받은 백화점들이 행사를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이 문을 닫으면 그때부터 우리는 매장 진열대에 휘장을 치고, 낮 동안 처리하지 못한 서류를 정리한다. 어린이집에 맡겨 놓은 아이들을 찾으러 갈 수가 없다. 결국 이모님을 고용해 아이를 맡겨야 되는데, 휴무일이 오락가락하니까 이모님을 부르는 일도 쉽지가 않다.

사회 : 면세점은 근무형태가 어떤가.

김성원 : 공항 면세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고충이 크다. 면세점 매장은 새벽 6시30분에 오픈한다. 시간 맞춰 인천국제공항까지 가려면 새벽 4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택시를 타고 가다가 공항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출근한다. 새벽별 보고 출근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사회 : 화장품 판매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얼마나 되나.

전하영 : 급여구조가 천차만별이라 평균을 내기 어렵다. 최근 임금협상 때문에 신입 직원들의 임금명세서를 다시 봤다. 세금을 떼기 전 임금을 기준으로 보더라도 딱 최저임금이다.

김연우 : 노동시간이 기니까 총액만 보면 최저임금보다 많아 보이는데, 시간단위로 역산해 보면 시간당 임금이 최저임금에 못 미치기도 한다. 여기 모여 있는 회사들 모두 최저임금 위반으로 고소·고발을 당했다. 명품 화장픔을 파는 노동자들이 정작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웃지 못할 상황이다.

유성규 : 임금으로 산정조차 안 되는 노동시간이 많다. 화장품 판매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아침에 출근해 풀메이크업을 한 뒤 제품을 팔아야 한다. 그런 시간은 노동시간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업무를 마친 후 매장을 정리하고 서류를 처리하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명품 팔지만 임금은 최저임금"

사회 : 감정노동 문제에 관해 얘기해 보자. 최근 ‘갑질 고객’ 관련 뉴스가 많았다. 라면상무 사건이나 땅콩회항 사건이 대표적인데. 백화점에서 벌어지는 실제 사례를 소개해 달라.

이은희 : 우리 직원한테 제품 문의전화가 왔다. 해당 직원은 매뉴얼대로 잘 설명했다. 그런데 전화를 걸었던 고객의 남편이 매장으로 전화를 걸어서는 “왜 우리 아내를 애 다루듯이 했느냐. 무시하는 거냐. 너 거기 가만히 있어라. 내가 지금 칼 들고 갈 테니까”라고 협박을 했다. 잘하면 잘한다고 욕먹고, 못하면 못한다고 욕먹는 것이 우리 일상이다.

김연우 : 백화점에서 쇼핑백 값으로 100원을 받는다. 한 VIP 고객이 “내가 이렇게 많이 구매를 했는데 쇼핑백 값을 받아야겠느냐”고 화를 냈다. 그러더니 100원짜리 동전을 바닥에 던졌다. 직원이 동전을 주워 오면 또 던지고, 주워 오면 또 던졌다.

전하영 : 직원이 작은 실수를 했을 때 물건을 던지거나 욕을 하는 고객이 너무 많다. 우리는 이런 고객들까지 블랙컨슈머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정도는 그저 '강한 고객님'이다. 우리가 말하는 블랙컨슈머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는 고객이다. 예전에 한 손님이 스킨을 사 갔다. 그런데 집에 가서 제품을 열어 보니 스킨이 없고 빈 병이었다고 컴플레인을 제기했다. 빈 병이었을 리가 없다. 빈 병이었다면 무게 차이 때문에 내가 먼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객은 막무가내로 화를 내며 “네가 나를 의심하고 도둑년 취급을 하는 것이냐”고 반발했다. 심지어 “백화점에 너를 자르라고 민원을 넣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고민 끝에 그날 저녁 꽃과 케이크를 사 들고 해당 제품과 사은품까지 들고 고객 집을 찾아갔다. 30분이 넘게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유성규 : 제3자가 들으면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상황이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할까. 백화점이나 화장품 업체들은 상세한 판매매뉴얼을 갖고 있다. 반면 소위 갑질 고객의 횡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매뉴얼이나 지침이 정립돼 있지 않다. 판매 촉진 매뉴얼은 있는데 진상고객 대응 매뉴얼은 없다.

▲ 정기훈 기자


"감정노동 대응 매뉴얼이 없다"

사회 : 미국의 한 대형 슈퍼마켓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한다. "규칙1. 고객은 항상 옳다. 규칙2. 만약 고객이 틀렸다면 규칙1을 다시 읽어라." 이런 매뉴얼을 직접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 것 같나.

전하영 : 비인격적이다. 만약 우리 남편이 이런 매뉴얼을 본다면 "그런 회사 때려치워라"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그런 문구만 없을 뿐이지 현장에서는 비슷한 논리가 작동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백화점측은 사건을 수습하려고만 한다. 직원이 무릎을 꿇어야 상황이 종료된다고 판단되면, 무릎을 꿇으라고 요구한다. 나도 무릎 여러 번 꿇었다. 따귀도 여러 번 맞았다. 그렇게 상황이 끝나면 1년치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데 울 수도 없다. 다음 손님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 : 진상고객 못지않게 미스터리쇼퍼로 불리는 위장고객도 힘들 것 같은데.

김성원 : 면세점의 경우 미스터리쇼퍼로 외국인까지 온다. 우리도 보면 감이 온다. 정해진 내용을 체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 회사는 1년에 7번 정도 미스터리쇼퍼를 이용해 모니터링을 한다. 언제 올 지 모르기 때문에 늘 감시받는 느낌이다.

이은희 : 미스터리쇼퍼가 오면 적어도 한 시간은 그 사람을 상대해야 한다. 매뉴얼을 처음부터 끝까지 실행해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장마다 인원이 부족하다. 저쪽에 진짜 고객이 오시면 갈등하게 된다. 미스터리쇼퍼를 버리고 손님을 맞는 것이 맞는데, 그러면 나의 인사고과는 엉망이 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지 회사에 묻고 싶다.

김연우 : 미스터리쇼퍼 평가항목 중 ‘감성평가’라는 것이 있다. “현재와 같은 서비스를 받게 된다면 다음에 또 쇼핑하러 오겠느냐”는 것이다. 직원들이 매뉴얼대로 업무에 응해도, 평가자가 주관적으로 불만이 있다고 느끼면 그만인 것이다.

이은희 : 평가방식이 점점 진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계산대 밑에 ‘오늘의 서비스는 어땠나’를 체크하는 기기를 설치해 둔다. 직원이 보는 앞에서 고객은 실시간 평가를 한다. 이 과정을 거쳐야 계산이 가능하도록 프로그램이 설계돼 있다. 현재는 롯데백화점이 해당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신세계백화점도 도입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우울증에 걸릴지 몰랐다"

사회 : 서비스연맹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연맹 조합원 2명 중 1명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 감정노동이 노동자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어떤가.

전하영 : 퇴근하고 집에 가면 예능프로만 2시간을 본다. 재미 있어서 보는 게 아니다. 그렇게 삭이는 것이다. 숨을 쉬기 어렵고 열이 심하게 나서 신종플루인 줄 알고 병원을 찾았다가 화병 진단을 받았다.

김명신 : 내가 우울증에 걸릴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사람들과 얘기도 잘하고 성격도 낙천적이기 때문이다. 진상고객이 와도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이니까 견뎌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뭘 먹어도 소화가 안 되고 자꾸 살이 빠졌다. 위 내시경을 찍으러 병원에 갔는데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스트레스로 인해 신경성 위장장애가 왔던 것이다. 우리 직원 중 한 명은 내내 괜찮다가 출근하려고 지하철만 타면 식은땀이 나고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출근길에 쓰러졌다. 병원에서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다.

사회 : 공황장애나 우울증에 걸리면 산재보험 적용은 받나.

김명신 : 산재를 증명하기가 어렵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 그 기록까지 인사고과에 반영된다. 본인이 뭔가 이상한 상태라고 인지하더라도 병원 치료를 받기 어렵다. 하물며 산재 신청을 하면 본인이 업무연관성을 입증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은희 : 회사는 노동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산재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남편과의 사이에 문제가 있다거나, 집안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식으로 몰아간다.

유성규 : 노동자가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에 걸렸다는 사실을 갑사인 백화점이 인지하게 되면 어떻게 처리할 것 같은가. “다른 직원으로 교체하라”고 한다. 산재 처리와 별개로 고용구조 자체가 특수하다.

사회 : 서울시가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전화상담원들을 위해 마련한 대응 매뉴얼을 살펴보자. "첫째. 화가 나면 심호흡하기/ 둘째. 심호흡해도 화가 안 풀리면 팀장에게 화내기/ 셋째. 휴식 취하기/ 넷째. 업무조절 잘하기/ 다섯째. 오늘 안에 풀기." 이런 내용이 대책이 될 수 있나.

"감정노동 보호법안, 백화점 현실과 거리 멀다"

김연우 : 팀장에게 화내기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전하영 : 감정노동자도 직종에 따라 상황이 다르다. 콜센터 노동자의 경우 마지막엔 전화를 끊어 버리는 방법이라도 있지만, 우리는 면전에서 감정노동이 이뤄진다. 서울시 대책을 보고 실소가 났지만, 이런 거라도 만든 게 어딘가 싶다. 우리도 협상을 통해 감정노동 매뉴얼을 만들었었다. 하지만 무용지물이 됐다. 백화점측이 매장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사회 : 19대 국회에 감정노동자 보호법안들이 발의됐지만 처리되지는 못했다.

유성규 : 법안을 보면 국회의원들이 백화점의 현실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실질적인 갑은 백화점이다. 판매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업무지시권을 행사한다. 그런데 법적으로는 사용-종속 관계가 아니다. 감정노동자 보호법안이 실효를 가지려면 사용자성을 발휘하는 백화점을 규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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