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영 인더스트리올 아태지역 전력네트워크 의장

우리나라에 전력산업 민영화와 경쟁체제·구조개편 정책이 도입되는 과정은 검토도 사회적 합의도 부실했다. 1997년 11월21일 당시 임창렬 경제부총리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했다고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검은색 가방을 든 IMF 실무진들이 속속 입국해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구제금융 협상을 벌이는 장면은 충격과 좌절을 넘어 외세에 의한 ‘경제 식민지’라는 ‘망국’의 수치감을 느끼게 했다. 그로부터 불과 10여일 뒤인 12월3일 IMF와 구제금융에 전격적으로 합의하면서 우리나라는 혹독한 구제금융 조건을 받아들이게 됐다. 정부는 고금리와 긴축재정, 자본시장 개방과 기업 구조조정 등 사실상 경제정책 전반에서 IMF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금융과 기업 구조조정이 시작되면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쫓겨났다. 고금리 정책이 지속되면서 건실한 기업조차 흑자도산했다.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IMF와 궤를 같이한다. 물론 한전 민영화와 구조개편 논의가 외환위기 때문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88년 노태우 정권은 자본시장 육성을 위해 한전과 포항제철을 대상으로 국민주 방식 민영화를 추진했다. 정부 보유주식 일부가 공모로 국민에게 매각됐다. 김영삼 정부 들어서는 2년간에 걸쳐 한국전력 민영화 가능성과 경쟁도입 방안, 경영혁신 방안을 놓고 경영진단을 실시했다. 경영진단 결과 ‘급격한 전력수요 증가와 민영화시 경제력 집중 문제’를 고려할 때 장기적이고 단계적인 민영화와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추진해야 한다는 권고가 나왔다. 그러나 한전 경영진단이 민영화를 전제한 탓에 민영화 필요성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검증하는 절차는 없었다. 아울러 경영진단 결과로 제시된 분할 민영화와 경쟁 중심 영국식 구조개편에 대한 타당성과 실증적 검토도 부족했다는 점에서 많은 논란이 제기됐다.

그러자 당시 주관 부처인 통상산업부(현 산업통상자원부)조차 경쟁 도입과 민영화 요구에 구체적인 논증이 결여된 데다, 한전이 부실공기업이 아니며, 전기가 비교역재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은 제안이라고 비판했다. 정부도 영국식 전력 구조개편이 한국 실정에 적합한지 좀 더 엄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힌 것이다. 결국 정부조차 한전 민영화를 부정적으로 봤기 때문에 경영진단에 따라 구성된 ‘전력산업구조개편위원회’는 외환위기 이전까지 제대로 된 논의를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IMF 구제금융 프로그램은 한전의 경영진단 결과와 전력산업 구조개편 논의 과정을 급반전시켰다. 발전소를 팔아서라도 외채를 갚아야 한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정부도 한전 민영화와 전력산업 구조개편 정책의 중요한 목적으로 외환위기 극복을 내세웠다. 이에 따라 98년 정부는 한전 민영화를 전제로 전력산업의 경쟁체제 재편을 위한 구조개편 논의를 급속하게 진행했다. 전력노조와 전문가의 우려를 뒤로한 채 99년 1월 이를 확정하면서 한전의 전력산업 구조개편 정책은 확정됐다. IMF는 사실상 전력산업 구조개편 정책의 ‘배후조종 세력’이었다. 정부는 전력산업 구조개편 추진목적으로 ‘외환위기 극복’을 내세웠고 ‘한전 부채’문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정책추진 논리가 옹색해질 즈음에는 ‘한전 비효율’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그럼에도 IMF를 비롯한 국제금융기구의 ‘권고’에서 비롯됐음을 숨기지 않았다.

실제로 IMF는 구제금융 조건으로 전력산업을 비롯한 각 국가의 전략산업 민영화와 경쟁체제 개편 등 구조개편 프로그램을 강요했다. 99년 멕시코에서 열린 전력산업 구조개편 관련 국제세미나에 참석한 학자와 전문가, 노동단체 대표들은 선언문을 통해 세계은행과 IMF 등 국제금융기관들에 의해 추진된 민영화가 각국의 국가 재산을 상실하고 요금인상과 공공서비스 손실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국제금융기관 배후에 있는 국제자본이 전력산업과 다른 전략산업을 지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조조정 정책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즉 전력을 비롯한 각국 전략산업 민영화가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며 국제 투기자본과 결탁한 IMF에 의해 전 세계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준 것이다.

당시 안영근 열린우리당 의원 또한 한국의 전력산업 민영화가 IMF 외환위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미국 압력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한미투자협정 관련 문서를 통해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필요에 의해 전력산업 구조개편 정책이 추진된 것이 아니라 투기자본과 IMF 등 국제금융기관, 그리고 이들의 중심세력인 미국에 의해 등 떠밀려 추진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졸속 추진된 우리나라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실패가 명약관화한 정책이었다. 그 부담을 국민과 노동자들이 져야 했다는 점에서 뼈아픈 부실 정책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인더스트리올 아태지역 전력네트워크 의장 (peoplewin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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