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지 않아도 넘쳐나는 뉴스를 피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최근엔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바둑대결이 주목받았다. 승리를 예상했던 이세돌이 연패하자 언론은 1천200대 CPU를 돌리는 기계와 1명의 인간이 대결하는 게임 룰이 애초부터 불공정하다는 분석까지 내놓았다. ‘알파고 반칙’은 많은 사람을 흥분시켰다.

바둑대결조차 불공정한 룰에 분노하게 되는 사람의 심리를 생각하면 공정한 사회, 즉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공평한 기회를 마련하고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룰이 작동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세기의 바둑대결이 끝난지 이틀 후인 지난 3월17일 유성기업 노조원이었던 한광호씨가 어느 야산에서 자결했다. 그의 죽음의 배경은 심야노동을 없애고 밤에는 잠 좀 자자고 외쳤던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의 파업이 있었던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조의 저항에 노조파괴 전문 노무법인 창조컨설팅과 원청인 현대·기아차가 함께 기획해 용역깡패를 동원한 불법적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이후 어용노조를 만들어 노조 분열을 조장했다. 각종 징계와 부당해고, 고소·고발 남발, 손해배상 청구 같은 조직적이고 악랄한 노동자 탄압이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성기업 노조원들의 몸과 마음은 황폐해져 갈 수밖에 없었다.

불과 몇 달 전에 유성기업 조합원들의 고위험군 우울증, 사회심리 스트레스, 외상후 스트레스 비율이 일반인보다 현저하게 높아 정신건강이 최악의 상태라는 조사 결과도 있었던 터라 한씨의 죽음에 안타까움이 남는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쇼에 불과한 바둑대결의 불공정함을 논하던 언론이 무수한 노동탄압에 견디지 못해 온몸으로 사측의 불공정함을 표현한 한씨의 죽음에 너무 조용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열사 추모를 위한 분향소 설치가 경찰에 가로막혔고, 밤샘 추모를 위한 방한용품도 강탈당했으며, 이에 항의하는 시민 2명이 연행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유성기업 노조원들이 생존을 위협당하고 있는데도 언론은 ‘불공정함’에 대해 아무런 보도를 하지 않았다.

유성기업은 복수노조를 앞세워 노동자를 편 가르고 감시카메라로 노조원 움직임을 감시하며 꼬투리를 잡아 징계를 남발했다. 현대·기아차는 하청업체인 유성기업에 어용노조 신규가입자를 높이라고 직접 지시하며 노조무력화에 개입했다.

그럼에도 어느 쪽도 부당노동행위로 처벌받지 않았다. 검찰의 증거불충분 무혐의 처분에 반발해 노조가 제기한 재정신청이 겨우 인용돼 지난 25일 만 5년 만에 유성기업 사측이 피고인으로 법정에 섰다. 사측은 다른 혐의는 인정하면서도 노조파괴 지배·개입 부당노동행위에 대해서만큼은 혐의를 부인했다.

헌법에서 보장한 노조의 단결권이 침해됐고 사측의 감시·징계가 현재 진행형이어서 사람까지 죽어 나가는데,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유성기업 사태는 너무나 불공정하다. 사측보다 상대적 약자인 노동자들을 보호해 사측과 노측 간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공정한 노사관계를 만들기 위한 룰이 노동법이지 않은가.

국회는 공정한 룰을 만들고, 고용노동부는 정해진 법규에 따라 공정하게 행정행위를 해야 하고, 법원은 불공정한 행위를 공정하게 심판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 구제받고 잘못을 한 사람이 처벌받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가.

그러나 비정규직 확대와 일반해고를 담은 노동개악을 시도하는 여당, 노동개악 국회 처리가 지연되자 법적구속력도 없는 양대 지침으로 쉬운 해고를 가능케 한 노동부, 최근 노조법상 조직형태 변경과 관련해 산별노조 해체와 부당노동행위 조장에 악용될 수 있는 전원합의체 판결을 내린 법원을 비롯해 노동관계를 둘러싼 일련의 상황을 보면, 아무도 공정한 노사관계 룰 만들기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 식구를 먹여 살리는 노동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일들이 공정하게 처리되면 좋겠다. 바둑대결의 불공정성에도 흥분하는데, 나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가족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직장생활에서 불공정한 일을 당하면 억울하고 화가 나지 않겠는가.

그래서 바란다. 유성기업 사측의 불공정함에 항거하다 생명을 잃은 한광호씨와 하청업체 뒤에 숨은 거대기업 현대·기아차의 치졸함에 대해 언론이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기를, 노동부가 특별근로감독을 자진해서 실시하고 건강한 노사관계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기를, 진행 중인 부당노동행위 형사사건과 노조에 제기된 손배사건에서 법원이 공정하고 올바르게 판단해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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