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아제강 해고노동자 김정근씨가 24일 오전 서울 한강 양화대교 아치에 올라 사측이 복직 협상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농성을 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여기 단 하루 파업으로 31년간 해고자로 살아야 했던 한 남자가 있다. 2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양화대교 남단 방향 철탑 위에 올라 “세아제강 해고자를 복직하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고공농성을 벌인 김정근(60)씨다.

김씨 인생을 뒤바꿔 버린 날은 1985년 4월25일이다. 그날 아침 주·야간 근무조 교대시간을 한 시간 앞둔 오전 8시. 김씨는 전날 영등포시장에서 구입한 빨간색 헝겊을 대나무에 묶어 만든 깃발을 흔들며 회사 본관으로 향했다. 대단한 구호를 외친 것도 아닌데 기다렸다는 듯이 직원들이 몰려들었다. 출근하던 오전조 근무자, 퇴근하려던 야간조 근무자 400여명이 깃발 주위에 운집했다.

그러더니 놀라운 광경이 이어졌다. 노동자들이 한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 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 물가에 심어진 나무 같이 흔들리지 않게.” 마침 이날은 대우자동차노조가 김우중 회장을 상대로 9일간 파업을 벌여 임금 16.4% 인상에 합의한 날이었다. 노동자들의 가슴에 피가 끓던 80년대의 어느 날이다.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

<매일노동뉴스>는 김씨가 양화대교 고공농성을 벌이기 이틀 전인 지난 22일 오후 서울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 근처에서 김씨를 만났다. 두 시간에 걸쳐 이뤄진 인터뷰에서 그는 해고된 뒤 ‘블랙리스트’에 올라 노동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연과 그 뒤 노동운동가로 살아온 삶의 이력을 덤덤하게 풀어놓았다.

중졸 학력이 전부인 김씨는 독학으로 배관기능사와 열관리·위험물 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82년 1월 ㈜부산파이프(현 세아제강) 구로공장 보일러실에 입사했다. 기능직이었던 그는 당시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일반 제조업 노동자보다 서너 배 높은 임금을 받았다.

그곳에서 김씨는 74년 4월 유신철폐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투쟁을 주도했던 정윤광씨를 만났다. 정씨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제적된 뒤 부산파이프에 취업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사회과학서적을 학습하며 언젠가 반드시 올 그날을 도모했다. 전두환 정권의 노동탄압이 임계치를 향해 치달을 때였다. 사납금 인하를 요구하며 시작된 대구택시노동자 파업과 노동운동의 주축이 경공업 여성노동자에서 중공업 남성노동자로 전환하는 신호탄이 된 대우자동차노조 파업으로 전국 노동현장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부산파이프가 포항에 공장을 새로 지어 가동하기 시작할 때였어요. 포항공장이 설비도 좋고 포항제철에서 자재를 싸게 구입할 수 있다면서 구로공장이 곧 폐쇄될 거라는 말이 돌았죠. 그런데 노조가 아무런 교섭을 안 하는 거예요.”

김씨는 파업 예정일을 앞두고 홀로 증권거래소를 찾았다. 재무제표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역시나 회사가 챙겨 가는 이윤에 비해 노동자 임금이 턱없이 적었다. 이런 내용을 빼곡하게 적어 놓았다가 파업 당일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가리방’(등사기 인쇄)을 할 줄 몰랐다. 물어물어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찾아갔다. 거기서 훗날 민주노총 초대 정책국장을 지낸 고 유구영씨를 만나게 된다. 고인의 도움으로 300장의 유인물을 찍어 낼 수 있었다.

한 손엔 유인물, 한 손엔 깃발을 들고

그날은 그렇게 찾아왔다. “임금 20%를 인상하라”는 내용이 담긴 유인물을 품에 안고, 구호 하나 적히지 않은 붉은색 헝겊을 매단 대나무 깃발을 흔들며 본관을 향하는 것으로 파업이 시작됐다. 예상치 못한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에 놀란 회사측은 노조와 밤샘 협상에 돌입했다. 파업 나흘 뒤인 85년 4월29일 극적으로 노사합의가 이뤄졌다. 임금을 7% 올리되 파업을 주도한 김씨를 해고하는 조건이었다. 해고 사유는 ‘불법파업 준비를 위한 무단결근’이었다.

“파업을 주도하면 해고될 게 뻔한데 왜 하셨어요?”

김씨 이야기를 듣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때 파업을 주도하지 않았다면 그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쿨하다. “그땐 다 그랬어요.”

김씨는 해고된 뒤 재취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땐 이유를 몰랐지만 훗날 블랙리스트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취직에 실패한 그는 영등포산선을 다시 찾아갔다.

“거기서 난생 처음 체계적 학습을 받았어요. 구로공단 노동자 20~30명이 사회·경제·철학을 배우고, 일대일 학습도 받았습니다. 그때 배운 변증법 철학이 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그 뒤로는 날이면 날마다 투쟁을 했다. 85년 6월 구로동맹파업, 86년 3월 구로 신흥정밀 박영진 노동자 분신사건,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87년 7월 이한열 사망사건 등 노동자들의 들끓는 가슴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계속됐다.

노동운동가 삶을 시작한 김씨는 보안 때문에 본명 대신 ‘해골’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몸무게가 50킬로그램 정도로 바짝 마른 탓에 붙여진 이름이다. 김호철씨가 작곡한 <파업가>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가사 “지키련다 동지의 약속 해골 두쪽 나도 지킨다”는 김씨를 모델로 한 것이다.

<파업가> 속 '해골' 실제모델 … "투쟁에 정년이 어딨나"

김씨는 현재 민주노총 총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구로동맹파업 당시 해태제과에서 투쟁하다 해고된 여성을 만나 결혼해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있다. 고 문익환 목사가 결혼식 주례를 봤다.

“결혼식 일주일을 앞두고 남대문경찰서에 연행됐어요. 낮에 결혼식 예복 가봉을 하고 저녁엔 구치소에 갇히는 신세가 됐죠. 문익환 목사님이 결혼식 당일 청첩장을 들고 남대문서에 찾아오셨어요. 오늘이 결혼식이니 풀어 달라고….”

해고자 부부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국가에서 받은 보상금으로 현재 살고 있는 서울 온수동 연립주택을 마련했다. 보상금이 아니었다면 지금껏 임대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올해로 60세.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정년을 맞았을 나이다. 그가 마지막 복직투쟁을 위해 양화대교에 오른 이유다.

“글쎄요. 이 싸움의 끝이 무엇일지 알 수 없지만, 하는 데까지는 해 봐야죠. 투쟁에는 정년이 없으니까요.”

한편 이날 고공농성과 관련해 경찰청의 중재로 김씨와 세아제강측은 앞으로 한 달간 집중교섭을 벌이기로 했다. 세아제강은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힘없는 노동자의 간절한 호소가 아닌 ‘부당해고’라는 자극적 표현 앞에 부도덕한 가해자로 왜곡되기 쉬운 기업을 상대로 벌이는 불법시위”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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