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가 쓴 <자본> 제1권 10장은 노동일, 즉 노동시간을 중심으로 당대의 끔찍한 노동조건과 노동과정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가득 차 있다.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알려 <자본>을 읽으려는 사람들에게 제1장이 아니라 10장부터 시작하라고 늘 권면하는 이유는 이 장이 이론이 아니라 생생한 사실의 기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출신 성분이 부르주아에 속했고 일상 생활도 노동자들의 비루함과 거리가 멀었던 마르크스가 공장 안에서 벌어지던 지옥을 마치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것처럼 자세하게 쓸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날마다 들른 도서관에 근로감독관의 보고서가 비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일요일도 없이 노동에 내몰리던 아이, 기계 옆 먼지구덩이에서 애를 낳고 다시 일해야 했던 젊은 여자. 육체적 폭력과 정신적 억압이 만연했던 공장의 지옥도를 분노와 슬픔을 억누르며 담담히 기록했던 근로감독관의 노고가 없었다면, <자본>은 그 밀도와 충격이 훨씬 덜한 이론서로 남았을지 모른다.

에탄올을 써야 하는 공정에 메탄올을 쓴 공장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영구 실명을 한 청춘들의 소식이 들려온다. 내로라하는 한국의 대표 기업들의 하청업체에서 생긴 일이다. 최첨단 전자제품을 만들어 내는 일류 기업의 공장에서 일한 젊은 노동자들이 각종 암으로 고생하다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진 지 십 년을 넘어가건만 아직도 한국의 공장들은, 그것도 최첨단 제품을 만드는 공정을 가진 공장들은 마르크스가 19세기에 <자본>에서 묘사한 지옥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830년대와 40년대 잉글랜드를 휩쓸었던 차티스트 운동은 본래의 목표였던 노동자계급의 보편적 투표권을 쟁취하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1847년 하루 10시간, 주 58시간 노동제를 명시한 공장법 개정을 이뤄 내는 주요 동력이 됐다. 법에는 아동과 여성에만 적용된다는 단서를 달았으나, 사실상 남성을 비롯한 모든 노동자들에게 노동시간단축이 적용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170년이 지난 2016년 3월 현재 대한민국 고용노동부가 용인하는 공식 노동시간은 주 68시간이다. 역사비교학적으로 노동부 관료들은 19세기 중반 대영제국 관료들보다 더 후진적이고 반동적인 인간관과 세계관의 소유자인 것이다. 인간으로서, 부모와 자식을 둔 생활인으로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 집권 초 '근로감독관과의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두 시간 남짓 이어진 '대화'를 녹화중계로 봤다. 전국 근로감독관 수백 명을 한자리에 불러 놓은 자리는 대화가 아니라 대통령의 강연이었다. 근로감독 문제는 30분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치개혁이 그날의 주된 이야깃거리였다. 근로감독 제도의 어려움은 무엇이고 개선책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결론이 모아지지 않았다. 다음날 언론이 기억한 이날 행사의 '야마'는 당연하게도 근로감독이 아니라 정치개혁이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는 대통령이 전국의 근로감독관들을 불러 모아 정권홍보용 이벤트라도 벌였다는 소식조차 들리지 않는다.

공장 안의 지옥 같은 상황을 보다 인간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 저질의 민주주의가 지속가능할 수 없음을 '헬조선'이란 말은 잘 보여 준다. 공장과 사무실이 지옥인 나라에서 절대 다수가 노동자로 늙어 갈 청년들의 인생이 지옥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착취라도 당해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착취의 결과가 암과 실명이라는 현실과 만나면서 대한민국이 처한 지옥도의 비극성을 증폭시키고 있다.

전국 사업장수는 300만개가 넘는다. 노동부에 속한 근로감독관은 1천 명 안팎이다. 근로감독의 질은 차치하고 양도 제대로 담보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근로감독관 개개인의 자질은 어떤가. 법이 정한 근로조건의 기준을 실현함으로써 노동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향상시키며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꾀하려 애쓰는 근로감독관이 얼마나 될까. 이제는 무너져 내리는 철밥통을 지키려 발버둥치는 '영혼 없는' 공무원으로 거세된 자들이 근로감독관 타이틀을 달고 자본과 국가의 하수인으로 복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삼십여 년 전 진학의 설렘을 안고 서울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문송면이라는 이름의 열여섯 소년이 수은중독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사건은 군사독재가 사라지더라도 지옥은 계속될 수 있다는 현실 인식을 십대 후반의 내게 던져줬다. 이제 날마다 터져 나오는 산재 사망과 암과 실명의 지옥선에 올라탄 청춘들의 소식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도 지옥이 계속되고 있음을 날마다 새롭게 인식시킨다.

지옥을 끝낼 때가 됐다. 어떻게? 답은 근로감독관에게 있다. 근로감독 제도의 혁명적 개선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 21세기 한국판 차티스트 운동을 조직할 역사적 임무가 한국 노동운동 앞에 놓여져 있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