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중공업 해양도장부 운영과장을 지낸 이아무개씨가 작성한 수첩. 노조간부를 감시하고 노조선거에 개입한 정황이 자세히 담겨 있다. 프레시안

현대중공업이 2013년까지 무려 19년 연속 무분규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데에는 회사측의 전사적인 노무관리가 배경으로 작용했다. 당시 회사측의 부당노동행위 정황을 보여 주는 증거자료가 속속 공개되고 있다. 노조 조합원을 성향별로 관리하고, 노조 대의원선거에 개입하는 등 회사측 부당노동행위가 광범위하게 진행됐음을 드러내는 내용이다.

'R(강성)·Y(중립)·W(친회사)' 조합원 성향 구분

금속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가 지난 18일 공개한 동영상에는 현대중공업 해양도장부 운영과장을 지낸 이아무개씨가 등장한다. 이씨는 “회사가 노조 조합원 성향을 R(적색·강성), Y(노란색·중립), W(흰색·친회사) 등 세 가지로 분류했다”며 “R에 해당하는 조합원이 많아질 경우 회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R를 Y·W로 유도하는 전략을 썼다”고 밝혔다. 일종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뒤 관리해 왔다는 얘기다.

현대중공업에서 노무관리 업무를 맡았던 이씨는 회사를 그만둔 뒤 사내하청업체를 운영해 왔다. 그런데 조선업종 불황이 계속되고 현대중공업의 기성(도급비) 삭감으로 임금체불 등 경영상 어려움이 심해져 현재는 업체를 폐업한 상태다. 이씨가 과거 자신이 가담했던 부당노동행위를 폭로하게 된 이유다. 최근 폐업한 사내하청업체 사장들로 구성된 사내협력사대책위원회가 현대중공업의 산재은폐 정황을 폭로하기도 했다.

인터넷언론 <프레시안>은 이날 이씨가 2004~2011년 현대중공업 재직 당시 작성한 수첩을 공개했다. 노조 활동을 상시적으로 감시하고 하청노조 설립을 견제하려 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수첩에는 “공대위·분과동지회(현장조직) 일거수일투족 보고-사장님 지시 일일단위 보고” “대·소위원 근무상황 매일 확인” “목표가 없으면 전략의 효과는 없다. 중간치에 있는 조합원에 대해 적극적으로 하자” “부서 내 취미서클 모임에 가입해 친화활동 해라” 등의 메모가 담겨 있다. 노조간부와 현장조직 활동가들을 감시하는 한편 일반 조합원을 회사쪽으로 포섭해 노조활동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현대중공업이 하청노조 설립을 사전에 차단하려 한 정황도 확인할 수 있다. 수첩에는 “하청노조 발생시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협력사 말 많은 사람 빨리 정리해야 한다” “(현대)자동차 하청노조 현재도 활동 중, 직영이 감당 못한다” “협력사 동향 철저히 파악” 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다.

회사측이 노조선거에 개입하려 한 정황도 눈에 띈다. 수첩에는 “대의원 출마 예정자 인물 검증해야 한다. 인물 확정시 연말까지 관리토록 하자” “부서별 면담 본격적으로 가동” “불리할 경우 유세를 하지 않고 투표 실시” “챙겨야 할 부분은 철저하게 엄밀하게 해야 한다. 반 중심으로 인당 8천원 지원해 주는 게 효과적”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노조선거 때 관리자가 투표용지 확인"

이씨는 “노조 대의원선거 때 전노회·공대위·청년노동자회 등 강성조직 후보가 대의원으로 출마하려면 일정 인원 이상의 추천서를 받아야 하는데 이를 막았다”며 “투표시에는 관리자급이 투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투표용지를 접지 못하게 한 사례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회사측이 노조선거에 직접 개입해 부정투표를 조장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같은 전사적 노무관리에도 현대중공업노조에는 2013년부터 민주파 집행부가 들어서고 있다. 회사측 잣대로 보면 'R 성향' 강성노조다. 그 이유를 짐작할 만한 대목이 이씨의 수첩에 담겨 있다.

“대의원 견제세력 없기 때문에 많이 해이해졌다. 작업현장에 없다. 대부분 돌아다닌다.”

회사측 지원을 받아 당선된 'W(친회사) 성향' 대의원들의 불성실한 활동에 대한 조합원들의 불만이 민주파 집행부 당선으로 이어진 셈이다.

한편 이날 폭로된 내용에 대해 현대중공업측은 “잘못된 관행이 있다면 고쳐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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