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영 인더스트리올 아태지역 전력네트워크 의장

소싯적에 허무맹랑하리만치 패권적인 할리우드 영화를 자주 본 적이 있다. 탄탄한 근육질 몸과 험상궂은 인상, 그리고 육중한 머신건과 로켓포를 들고 1개 여단급의 병력을 혼자서 모조리 때려잡는다는. B급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대명사 코만도의 주인공이었던 아널드 슈워제네거. 그가 미국 최대의 주(州)이며 세계 5위 경제규모를 가진 캘리포니아주를 책임지는 주지사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전력산업 민영화와 규제완화 덕분이었다. 그것도 전통적인 민주당 텃밭에서 공화당 후보였던 그의 당선은 영화배우로서의 유명세 때문이 아니었다. 전력민영화와 규제완화로 캘리포니아 전력대란이 일어났고, 전기요금이 폭등하면서 주 재정으로 이를 메우게 되자 이에 격분한 주민들이 유능한(?) 재선 주지사를 소환하면서 어부지리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온타리오주는 캐나다 10개 주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다. 미국과 인접한 지리적 영향으로 미국경제와 많은 부분에서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 만큼 캐나다와 미국을 연결하는 캐나다 경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캐나다의 대표적인 지역이었던 온타리오주도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마찬가지로 전력민영화와 규제완화를 추진하면서 비슷한 정치적 경험을 하게 된다. 2002년 5월 온타리오주는 전력공기업인 하이드로원을 분할해 민영화하고 규제완화를 추진했다. 물론 캘리포니아 전력사태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도매요금(발전사와 전력판매사 간 거래요금)과 소매요금(전력판매사와 소비자 간 요금)을 경쟁에 의해 결정하는 좀 더 경쟁시장에 가까운 급진적인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러나 불과 7개월 후 1킬로와트에 3센트 미만이었던 도매요금은 무려 9센트 가까이 올랐고, 급등한 도매요금은 고스란히 소비자의 부담으로 전가되면서 주민들은 격분했다. 이에 놀란 주 수상은 전력 규제완화를 중단하고 전기요금 동결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동안 소비자들이 과다 부담한 전기요금을 환급해 주겠다고 수습에 나섰다. 사실상 규제완화 이전으로 돌려놓은 셈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주 수상의 이런 조치는 주정부 재정만 악화시켰을 뿐 싸늘한 민심을 돌려세울 수는 없었다. 이듬해 실시한 주정부 선거에서 보수당 출신 주 수상은 낙마했다. 전통적인 보수당 지역이었던 온타리오에서 보수당은 주 수상뿐만 아니라 의회 다수당의 지위도 야당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민영화와 규제완화로 인한 국민의 정치적 분노는 선거를 통한 정치권력을 바꿔 내는 수준에만 머물지 않았다. 남미 페루에서는 좀 더 과격하고 급진적인 정치적 선택이 이뤄졌다. 2002년 후지모리 정권 청산을 내걸고 당선된 톨레도 대통령은 민영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빈곤퇴치 등 서민층을 위한 그의 공약 덕분에 출범 당시 지지율은 74%에 달했다. 그러나 그의 지지율은 전력민영화를 추진하면서 급전직하했다. 남부지역에 전력을 공급하던 두 곳의 발전소를 벨기에 회사인 트랙테벨에 매각하면서 남부지역 중심도시였던 아레키파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후지모리 정권 당시 리마 중심 경제정책으로 낙후됐던 이곳 주민들은 또다시 발전소마저 매각하게 되자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톨레도 대통령은 비상사태까지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이를 막으려 했지만 오히려 주민들의 분노만 사게 되면서 결국 발전소 매각은 법원 판결에 맡기는 식으로 한발 물러섰다. 정치적 책임은 내무부 장관이 사임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톨레도 정권에 대한 지지는 사태 직후 18%에 불과했고,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하락해 퇴임 직전인 2005년에는 8%라는 초라한 성적을 받아야 했다.

2007년 유럽연합 일원이 된 불가리아도 전기요금 때문에 총리가 사퇴하는 등 드라마틱한 정치권력 변화가 이뤄졌다. 2013년 이들 전력회사들이 전기요금을 대폭 인상하면서 전기요금 부담이 크게 증가하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에 대거 나섰다. 수도 소피아와 전국 주요 도시에서 수만명이 모여 전기요금 폭등을 초래한 민영화 정책과 정부를 비판하자, 총리는 재무장관을 해임하고 국영전력회사와 계약을 파기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설득에 나섰으나 국민 분노가 가라앉지 않자 결국 사퇴했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전기·수도·의료·가스 등 ‘예외 없는 민영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파동으로 촉발된 시민들의 분노가 민영화로 옮겨붙으면서 핵심 공공서비스 민영화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전력을 비롯한 필수 공공서비스를 자본 이윤을 위해 사유화시키면서 정치적 대가를 치른 많은 사례 중에서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했다. 자, 이쯤 되면 '전력(power)=권력(power)'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인더스트리올 아태지역 전력네트워크 의장 (peoplewin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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