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충격과 안도. 인공지능 알파고와 인간 이세돌의 대국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심장은 이렇게 소용돌이쳤다. 지난 9일·10일·12일의 패배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13일의 승리에 안도했다. 5전3승으로 이미 알파고가 승리를 확정한 뒤였으니 알파고가 인간의 심장을 가졌다면 한 판의 승리에 우리가 이토록 안도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두렵다. 지금 우리의 심장은 두려워서 안도했던 것이다. 바둑에서 인공지능에 패배했다고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바둑에서조차 인간을 이길 정도라면 인간의 머리를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도 있다. 머리로 다른 생물종에 비해 우월성을 확보해 정복과 약탈, 지배로써 주인 행세를 해 왔던 우리였다. 인공지능 앞에서는 더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인공지능이 인간을 배신하기라도 하면 인간이 노예가 될지도 모르는 세상이 두려운 것이다. 주인과 노예의 질서였다. 인공지능이 주인이 되고, 인간이 노예가 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고 알파고의 승리에서 예감하고 우리는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세돌이 한 판을 이겼을 때 그것은 당장 올 세상은 아니라고 우리는 안도했던 것이다. 그렇다. 노예로 살아가는 세상은 두렵다. 스카이넷이 지배하는 ‘터미네이터’의 세상이 두렵다.

2. 인간의 역사에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다양하게 변화해 왔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몇 차례의 산업혁명과 사회구조 등 그 변화를 설명하는 이론도 다양하지만 그 이론이 어찌 됐든 간에 지배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의 관계가 다양하게 변화해 왔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름도 노예·노비·농노에서 오늘은 노동자(근로자)로 달라졌다. 달라졌지만 달라지지 않은 것은 복종하는 자라는 것이다.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를 근로자로 명명하고서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라고 규정하고(제2조제1호), 근로계약을 “근로자가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하고, 사용자는 이에 대해 임금을 지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체결하는 계약”이라고 규정하고 있다(제2조제4호). 단순히 타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근로’를 제공하는 자가 근로자인 것이다. 대법원 판례는 여기서 ‘근로’는 사용종속관계에서 일하는 것을 말한다고 판시해 왔다(대법원 2014.2.13 선고 2011다78804 판결 등). 업무지휘권· 인사권 등 사업장 내에서는 사용자가 주인이라고 수많은 사건에서 반복해서 판결해 왔다. 사용자의 지휘명령에 복종해서 일해야 하는 자가 근로자라고 우리의 세상은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노예·노비·농노 등 이전 세상의 복종하는 자들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합의하고서 일정 시간을 정해서 일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지급받는다는 것이다. 지배와 복종이라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보자면 인간의 역사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인공지능의 노예가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모든 인간이 동일한 크기로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닐까.

3. 알파고의 주인은 구글이다. 인공지능의 창조주가 인간이라며 인간이 인공지능의 주인이라고 당신이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공지능 알파고의 주인은 구글이라는 회사다. 회사는 필요에 따라 법률로 권리의무의 주체로서 지위를 부여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회사는 주인이 있다. 주식회사는 주식을, 다른 회사도 지분 등을 소유한 주인이 있다. 결국 알파고의 주인은 구글이라는 회사를 지배하는 사람이다. 이 세상 많은 회사처럼 구글에서 알파고를 만든 자도 사용자 구글과의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근로’를 제공해 온 ‘근로자’들이다. 그런데 인공지능 알파고는 구글에서 사용자와 근로자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아무것도 없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알파고로 인해서 그 관계가 변화될 것이라고 예상되지 않는다. 알파고를 둘러싸고 수많은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세상이 변할 것이라고, 제4차 산업혁명이 도래했다고, 기존의 사회구조가 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변할 것이다. 알파고, 인공지능이 없었던 세상과 인공지능이 있는 세상으로,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지배와 복종의 질서까지 달라질 것인가.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에서 알파고의 승리에 모두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그 ‘두려움’, 모든 인간이 인공지능의 노예가 되는 세상은 적어도 알파고의 세상에서는 아니다. 알파고의 주인은 구글이고 구글의 주인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 올지 모를 세상을 두고서 터미네이터의 세상이 올 거라고 알파고가 스카이넷으로 발전할지 모른다고 너무 추상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면서 현실에서 존재하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들여다보지 않고 있다. 알파고를 만드는 구글의 노동자조차도 그럴 것이다. 인공지능에 지배될 세상은 두려워해도 자신이 근로계약에 따라 사용자 구글에 복종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임금·복지 등 근로조건이 타 사업장에 비해 월등히 우월하기 때문에 구글의 근로자인 것에 높은 자부심을 갖고 있을 것이다. 어디 구글의 근로자뿐이겠는가. 오늘을 사는 근로자는 그렇다. 복종하는 데 대해 두려움조차 없다. 보다 근로조건이 우월한 사업장에서 근로를 한다는 것이 희망사항이다. 복종할 수 있다는 것이 자부심의 원천이다. 이렇게 복종하는 것이 두렵지 않을 정도로 우리의 세상은 성공했다. 더구나 오늘은 누구도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을 정도로 이 자본의 세상은 성공했다. 회사를 소유한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 근로자는 거의 관심 없다. 근로계약을 체결한 사용자 회사에 복종하는 데 관심이 있다. 이런 세상에서 회사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고 인공지능이라고 해도 뭐가 달라질 것인가. 없던 두려움이 갑자기 생겨나 근로자들이 복종을 거부해서 파업 투쟁이라도 할 것인가.

4. 인공지능으로 제4차 산업혁명이 시작됐다고 야단이다. 신세계, 새 세상이 오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혁명의 역사였다. 산업혁명을 몇 차례였다며 시대구분을 하든, 인간이 도구를 혁신해 온 역사였다. 사회·인간의 관계도 계속 변화해 왔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도구를 혁신해 왔던 것처럼 자신의 살아가는 사회구조도 혁신했다. 도구의 혁신은 인간의 세상에 대한 지배력을 엄청난 규모로 확대·강화해 왔다. 이미 산업현장에서는 인공지능이 아니라도 산업용 로봇 등 자동화기계가 넘쳐 나고 있다. 노동력을 대체하는 기계는 도구의 혁신을 통한 산업혁명, 아니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한 인간의 역사에서 계속됐다. 느닷없이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호들갑 떨 일은 아니다. 지금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그런데 도구의 혁신은 그 도구를 소유한 자의 지배를 확대·강화시켰다. 이 세상에서 그것은 화폐·자본의 크기로 정해져 있다. 알파고의 구글이야말로 그 절정의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엄청난 자본을 투입해서 인공지능 알파고를 개발하고 있는 구글은 매출·순이익 등 자신의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자본의 크기가 우리 세상에 대한 지배의 크기다. 보다 많은 자본의 축적은 보다 높은 지배력을 보장받는다. 인간의 역사에서 몇 차례의 산업혁명에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 지배와 복종의 질서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 지배의 크기와 힘이 확대·강화돼 왔다. 이와 같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보자면 알파고의 승리는 이 세상의 주인, 자본의 승리일지언정 인간에 대한 인공지능의 승리라고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인공지능이라는 도구로 자본의 지배력이 커질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는 노동자라면 말이다.

5. 인공지능이 가져올 혁신은 높은 수준의 생산성 증대로 나타날 것이다. 현재 노동자가 수행하는 많은 일들을 대체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영국의 산업혁명 당시 러다이트, 즉 기계파괴 운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러다이트를 통해 노동운동이 깨달았던 것처럼 기계의 탓이 아니다. 노동자가 적게 일하고서 살 수 있는 세상, 나아가 노동자가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노동운동이 전개돼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세상이라도 자본이 주인인 세상이라면 자본은 인공지능을 자신의 지배력을 확대·강화하는 데 이용할 것이다. 이대로라면 말이다. 구글 등의 사례를 통해 보면, 이미 자본 하나의 힘이 웬만한 나라가 가진 힘보다 큰 세상이다. 그런데도 사용자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 보호는 날로 약해져만 가고 있다. 각국의 노동법은 경쟁하듯이 노동자권리를 포기하고 있다. 자본에 대한 통제 없는, 인공지능 세상이 두렵다. 노동자의 심장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 뛰도록 해야 한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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