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2006년 현대자동차노조가 금속노조로 전환할 때 조합원들에게 굉장히 긍정적인 청사진을 제시했었다. 최근 한 대의원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지난 10년의 산별운동이 당신이 제시한 희망적 청사진에 부응했는가.’ 산별교섭을 보장하는 법과 제도가 전무한 상황에서 현대차 사용자를 교섭테이블에 앉히는 데 실패했다. 대공장과 중소사업장,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줄일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노조 스스로도 정형화된 교섭 형식에 집착한 나머지 내용을 채우지 못했다. 당장 중앙교섭을 강화할 수 없다면 실현가능한 교섭경로를 모색해야 했다. 많은 토론과 논쟁 끝에 현대차그룹사 공동교섭 방안을 도출하고 요구안을 마련했다. 금속노조가 지향하는 교섭형태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하지만 교섭의 내용을 산별노조의 이해와 최대한 일치시켜 나갈 것이다. 현총련(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 복귀가 아니다.”

박유기(52·사진)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장의 말이다. 금속노조가 올해 산별중앙교섭과 별개로 현대차그룹사 공동교섭을 추진한다. 자동차·철강·철도산업 발전 미래전략위원회 구성과 재벌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를 골자로 하는 교섭요구안도 마련했다. 현대차그룹사 소속 16개 지부·지회는 다음달 19일 공동교섭 상견례를 개최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1일 현대차 울산공장 지부사무실에서 박유기 지부장을 만나 현대차그룹사 공동교섭에 대한 구상을 들었다.

“정몽구·정의선 부자 주식배당금 20%만 내놓아도 청년일자리 800개 창출”

- 현대차그룹사 공동교섭이 제안된 배경은.


“금속노조 산별중앙교섭이 갈수록 힘이 빠지는 상황이다. 노조 조합원 15만명 중 9만명이 현대차그룹사 소속인데, 그룹사 소속 16개 지부·지회 중 14곳이 중앙교섭에 불참하고 있다. 산별교섭 법제화가 안 된 상태다 보니 해당 기업 사용자의 산별교섭 참여를 강제할 방법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는 업종별 교섭이나 그룹사별 교섭 같은 초기업 단위 교섭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일단 교섭의 장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논쟁과 토론 끝에 현실적 실험을 해 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 현대차지부는 노조 내 최대 조직이다. 그룹사교섭 방침에 대한 지부의 입장이 궁금하다.

“지부는 노조가 방침을 만드는 과정에 함께했다. 노조 중앙집행위원회·중앙위원회·대의원대회를 거쳐 방침이 확정됐다. 중집에는 내가 직접 참여했고, 중앙위에는 지부 확대운영위원들이 참석했다. 이달 3일 열린 노조 임시대의원대회에 지부 대의원 195명이 참석해 교섭방침을 의결했다. 노조 입장이 지부 입장이다.”

- 그룹사교섭 요구안이 확정됐다.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우리나라 자동차·철강·철도산업이 현대차그룹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산업발전과 일자리 창출·조합원 고용안정을 위해 노사가 참여하는 미래전략위원회 구성을 요구하려고 한다.

국내 서열 2위 재벌기업인 현대차그룹의 사회적 책임 확대 차원에서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에게 사회연대기금 출연을 요구할 것이다. 정몽구 회장이 올해 주식배당금으로 773억원, 정의선 부회장이 494억원을 받는다. 이 중 20%를 사회연대기금으로 출연해 청년일자리를 만들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요구할 계획이다. 253억원 정도 된다. 연봉 3천만원 기준으로 800개가 넘는 청년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장기근속자 임금을 깎는 임금피크제로 청년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주장한다. 연봉 8천만원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10% 삭감시 1명당 800만원의 임금이 줄어든다. 3천명이 넘는 직원의 임금을 깎아야 253억원이 된다. 노사갈등이 불가피하다. 왜 이런 갈등을 겪어야 하나. 일자리를 만들려면 재벌이 돈을 내놓으면 된다.”

- 다른 재벌기업과 마찬가지로 현대차그룹 역시 경영권 승계 과정에 있는데.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불법이나 편법이 있어서는 안 된다. 경영권 세습을 위해 계열사를 매각하거나 인위적으로 구조조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요구안에 담았다. 지난달 원샷법으로 불리는 기업활력제고를 위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신용등급이 A등급인 정상기업도 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구조조정을 할 수 있다. 법이 통과되자 벌써부터 현대모비스와 글로비스 합병설이 매스컴에 오르내린다. 경영권 승계를 위해 멀쩡한 기업을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

- 자동차산업의 미래경쟁력 확보는 고용 문제와 직결된다. 미래전략위원회가 구성된다면 어떤 논의를 할 생각인가.

“전기자동차가 상용화된다고 생각해 보자. 전기차에는 엔진이나 변속기 대신 배터리가 장착된다. 전기차가 우리 공장 생산라인에 올라오면 당장 엔진사업부나 변속기사업부·소재사업부 일자리가 없어진다. 자동차 기술의 발전은 고용 문제와 직결된다. 현대차그룹의 건전한 성장과 발전을 위한 길을 노사가 함께 모색해야 한다. 국내 공장 경쟁력 유지·강화 차원에서 해외공장 문제도 다뤄야 한다. 계열사별로 미래전략을 모색해 봤자 단기적 처방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룹사 차원에서 논의해야 한다.”

“현대차 협상 결과만 쳐다보는 계열사 노사, 제자리로 돌아가야”

- 다음달 19일 그룹사교섭 상견례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그룹측은 공동교섭에 참여할 법적 의무나 이유가 없다는 입장인데.


“교섭 상견례를 다음달 19일 열자고 그룹측에 요구했다. 요구안 발송 날짜는 4·13 총선 일정을 감안해 조율하기로 했다. 그룹측이 상견례를 거부하면 다른 날짜를 정해 재차 요구할 것이다. 이와 함께 단위사별로 임금·단체협상을 병행한다. 그룹사교섭만으로는 쟁의권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투 트랙으로 간다. 6월 중 노동쟁의조정 절차를 거쳐 6월 말에서 7월 초 사이에 공동투쟁에 나선다. 단위사별 임단협 돌입 시점은 금속노조 중집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5월 중에는 대부분 사업장에서 임단협이 시작될 것이다.”

- 그룹사교섭 방침을 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새로운 실험에 대한 기대가 있는 반면 대공장 노조들만의 리그를 꾸리는 것이 산별정신에 어긋난다는 비판도 있다.

“그룹사교섭에 참여하는 16개사가 전부 대공장은 아니다. 조합원수 기준으로 다이모스 550명, 케피코 880명, 엠시트 충남공장 186명, 엠시트 경주공장 71명, 아이에이치엘 339명이다. 중소공장이 포함돼 있다. 대공장 노조들이 자기 이해를 관철하려고 뭉친 게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이와 별개로 그룹사교섭 방침이 산별정신에 위배되지 않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초 업종별교섭을 검토했지만 현대차를 제외한 한국지엠·르노삼성·쌍용자동차 모두 외자기업인 상황에서 교섭틀을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룹사교섭은 현실적 선택이었다. 대신 산별정신에 부합하는 내용의 요구안을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 현대차그룹과 금속노조가 직접 교섭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룹사교섭이 과도기적 기구로 기능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진전이라고 판단했다. 이마저도 하지 않는다면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6기 금속노조 위원장을 지냈고, 2006년 현대차노조의 금속노조 전환 총회를 이끈 당사자이기도 하다. 금속산별운동 10년을 평가한다면.

“중요한 무엇인가가 빠져 있다. 이른바 독일식 산별노조를 꿈꾸면서 정형화된 교섭틀이나 지역 중심 조직개편 같은 형식에 집착했다. 지역지부로 가야 한다거나 중앙교섭을 해야 한다는 목표는 있는데 내용을 채우지 못했다. 산별노조를 강화하고 산별교섭을 진전시켜 나가려면 어떤 프로세스가 필요한지, 조합원 교육과 간부 훈련은 어떻게 해 나갈지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고민을 하지 못했다.

금속노조 위원장을 할 때 능력의 한계를 느꼈다. 그룹사교섭 방침은 이런 고민 속에서 제출됐다. 한국은 재벌 중심 자본주의 사회다. 이런 구조라면 재벌그룹에 속한 노동자들이 재벌에 맞서 싸워야 한다. 계열사와 협력업체까지 아우르는 현대차그룹의 노무관리로 인해 대부분 사업장에서 노사교섭이 형해화됐다. ‘현대차 협상결과 보고 합시다’ 하는 식이다. 이런 관행이 조합원들의 의식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금속노조가 강화되려면 현대차 계열사 노사관계부터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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