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자운 변호사(반올림 상임활동가)

대상판결/ 서울행정법원 2013구합53677 유족급여및장의비부지급처분취소

사건의 경과

이은주씨는 만 17세였던 1993년 4월에 삼성전자 온양사업장에 입사해, ‘금선연결’ 공정 오퍼레이터로 근무했다. 반도체 생산라인은 크게 웨이퍼 가공공정과 칩 조립공정으로 나뉘는데, 온양사업장에는 칩 조립공정이 있다. 그 안에서도 이은주씨가 담당했던 금선연결 공정(Wire bonding)은 둥근 웨이퍼를 네모난 칩 단위로 자르고(절단), 그 칩을 에폭시류 접착제를 이용해 리드프레임이라는 회로기판에 붙인 후(칩 접착), 칩과 리드프레임 사이를 금선으로 연결해 주는 공정(금선연결)이었다.

이은주씨는 입사한지 약 6년2개월이 지난 1999년 6월, 구토·복무팽만 등의 건강이상으로 퇴사했고, 이듬해인 2000년 4월 “난소의 점액성 종양(경계성)” 진단을 받았다. 이후 오랜 투병생활을 한 끝에 2012년 1월, “난소암의 전이에 따른 직장 출혈 및 다발성장기부전”으로 사망했다.

망인은 삼성전자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매우 건강했고 관련 질환에 대한 병력이나 가족력도 없었으나, 삼성전자 온양사업장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화학물질에 노출된 채 만성적인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망인의 아버지는 망인의 난소암이 직업병이라고 판단해 2012년 4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의 유족급여 및 장의비지급을 청구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역학조사를 의뢰했는데, 산보연은 “난소암과 관련이 있는 유해인자로는 석면·탈크·방사선 등이 알려져 있으나, 금선연결 공정에서는 이것들을 취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업무 관련성이 낮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산보연의 조사에는 재해자측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배척하고, 사업장에 대한 별도의 작업환경 측정을 하지 않는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근로복지공단은 2013년 2월 “질병과 업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유족급여 불승인 처분을 내렸고, 유족은 이에 불복해 2013년 5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판결의 요지

서울행정법원 제2부(재판장 박연욱)는 아래에서 나열하는 사정들에 비추어 유해물질 노출, 주야간 교대근무, 누적된 피로·스트레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망인의 난소암이 발병한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고 했다.

첫째 난소암, 특히 망인에게 발병한 ‘점액성’ 난소암은 발병률이 낮은 질병이고, 망인의 경우 이른 나이에 이례적으로 난소암이 발병했으며, 망인에게서는 직업적 환경 요인을 제외하고는 개인적 위험인자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둘째 “화학물질 노출”과 관련해 망인은 업무 중 발암물질과 생식독성 물질을 함유한 ‘접착제’, 발암물질인 ‘납’, 생식독성 물질이 포함된 ‘세척제’에 지속적으로 노출됐다고 봤다. 또한 클린룸(Clean room)의 환기 특성상 다른 공정에서 노출된 유해인자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유해물질 노출 정도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설령 그 농도가 낮다고 하더라도 장기간 지속적으로 노출됐다면, 그 유해성을 가볍게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셋째 “주야간 교대근무”와 관련해 먼저 그러한 근무형태가 피로·스트레스를 유발하거나 호르몬을 교란시켜, 그 자체로 질병을 촉발하거나 면역력을 저하시킴으로써 질병의 발병·악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런데 망인은 6년2개월간 2교대 또는 3교대로 주야간 교대근무를 했으므로, 그러한 근무형태가 난소암의 직접적 발병원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다른 요인들과 함께 복합적으로 질병의 발병 내지 악화에 작용했을 것으로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한편 재판부는 ‘업무 관련성이 낮다’고 결론 내린 산보연의 역학조사에 대해 네 가지의 문제점을 짚었다. 먼저 산보연은 유족측이 유해인자로 주장한 화학물질(4-VCD, 4-VCH)과 난소암 간 관련성을 모두 배제했는데, 합리적 이유 제시나 조사도 없이 그러한 판단을 내린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또한 다른 연구에서 반도체 공정에서 쓰이는 에폭시레진 물질로부터 발암물질이 노출된다는 사실이 확인됐음에도, 망인이 취급한 에폭시레진 물질에 대해서는 추가 조사 없이 난소암의 관련성을 부정했는데, 이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리고 “공기 중 유해인자에 대한 작업환경조사도 실시하지 않은 채 난소암과 관계있는 물질에 노출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도출한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고, 끝으로 “일부 역학조사 결과만을 들어 반도체산업 근로자들에 대한 역학조사에서 난소암 발생 및 사망위험이 일반 인구집단보다 유의하게 높게 발견되지 않았다고 단정한 것 역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판결의 의미

직업병으로 산재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업무환경의 유해성’과 ‘질병과 업무 간의 의학적 관련성’이 인정돼야 하고, 그에 대한 입증책임은 모두 재해노동자측이 진다. 그런데 두 가지 모두 입증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문제여서, 대부분 직업병 피해자들이 입증 곤란 문제를 겪게 된다.

이 사건에서도 그랬다. 먼저 ‘업무환경의 유해성’과 관련해 사측이 업무환경에 관한 자료를 제대로 구비하지 않았거나 관련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 망인의 업무환경에 대해 거짓 진술을 하기도 했다. 예컨대 삼성은 망인이 취급했던 ‘접착제’의 제품명과 ‘세척제’ 취급 여부에 대해 거짓 진술을 하고, 그 접착제의 일부 성분과 사업장의 안전보건 상황에 대한 진단 보고서는 재판 과정에서도 끝내 공개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재해조사를 맡은 산보연조차 위에서 언급했듯 조사 자체를 매우 부실하게 했다. 결국 회사와 근로복지공단의 잘못으로 인해, 망인의 업무환경을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 돼 버렸다.

또한 ‘질병과 업무 간의 의학적 관련성’과 관련해서는 ‘난소암’이라는 질병 자체에 대한 의학적 연구가 많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난소암의 발생률은 10만명당 3.5건 정도다. 이 사건 망인의 경우처럼 20~24세에 난소암이 발병할 확률은 전체 난소암 유병자 중에서도 2.19%에 불과했다. 이처럼 발병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질환일수록 관련 연구는 적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질병과 업무환경 간의 의학적 관련성에 대한 입증을 곤란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결국 ‘업무상질병’에 대한 산재소송에서는 이러한 경위로 발생하는 입증 곤란 상황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문제가 생긴다. 달리 말하면 산재보험법상 ‘재해자 입증책임의 원칙’을 도식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입증곤란에 따른 불이익을 재해자에게 모두 전가하는 대단히 불합리한 상황이 계속 생겨나는 것이다.

이 사건 판결의 가장 큰 의의도 재판부가 바로 그러한 문제상황을 깊이 고민해 적극적인 해법을 제시했다는데 있다. 아래 세 가지 문장이 특히 주목된다.

“난소암, 특히 망인에게 발병한 점액성 난소암은 그 발병률이 낮은 질병이고, 그 발병원인이나 발생기전이 의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지지 아니한 질병이므로, 발병률이 높은 질병, 발병원인 및 발생기전에 대해 의학적으로 연구가 다수 이루어진 질병에 비해 상당인과관계에 대한 증명의 정도가 완화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산보연은 재해자측이 주장했던 일부 유해물질들에 대해서는 난소암과의 관련성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사 대상에서 배제해 버렸는데) 이는 의학적인 관점에서 명확한 인과관계를 다지는 방식으로 적절할지 몰라도, 업무상재해에 있어 상당인과관계를 판단하는 방식으로는 적절하다고 볼 수 없다.”

“작업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산업안전보건상의 위험을 사업주나 근로자 어느 일방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公的)보험을 통해 산업과 사회 전체가 이를 분담하도록 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목적 등에 비추어 보면, 근로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사정에 관해서는 증명책임에 있어 열악한 지위에 있는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인정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결국 의학적 한계, 산보연의 부실한 조사, 회사의 자료 은폐 등으로 입증 곤란의 상황이 발생했다면, 입증의 정도를 완화하거나 적어도 그러한 상황 자체를 재해자 측에 불리하게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특히 맨 처음 문장, 즉 ‘발병률이 낮아 의학적 연구 자체가 어려운 질환에 대해서는 입증의 정도를 완화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취지의 판시는 산재소송에서 처음 나온 것으로 보인다.

산재보험법상 ‘업무 관련성’ 판단의 본질과 산재보험제도의 취지ㆍ목적에 부합하는 판결로 평가된다. 그 ‘업무 관련성’ 판단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코 자연과학적ㆍ의학적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해 사건에 대한 산재보험제도의 적용여부를 판단하는 법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근로복지공단이 항소해 이 사건은 항소심의 판단을 다시 기다리게 됐다. 1심 판결에서 공단의 재해조사에 많은 문제가 있었음이 구체적으로 지적됐고, 여러 정황상 공단도 그러한 문제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공단이 항소를 포기하지 않고 유족들을 다시금 기약없는 법정 싸움으로 내모는 것은, 대단히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아무쪼록 고등법원에서도 이 사건 원심판결의 올바른 취지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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