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성래 공인노무사(현장노무사사무소)

2015년 해넘이를 앞둔 12월의 어느 날 아침. 똑똑똑! 주름 가득한 남성 한 분이 사무실을 찾아오셨다. 건설현장에서 한겨울 추위를 이기기 위해 많이 입는 상하 일체형 작업복을 입고 그 위에는 건설회사 이름이 자수로 새겨진 작업조끼를 덧입고 있었다. 누가 봐도 건설노동자임이 확실했다.

‘대체 무슨 일로 우리 사무실을 찾아왔을까?’ 잠시 생각하는 순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자네 여기서 일하고 있었나?” 고개를 들어 얼굴을 자세히 살핀 뒤에야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2014년부터 2년간 플랜트건설노조 경인지부 사무국장으로 일할 당시 연을 맺은 용접사 조합원이셨다. 수많은 조합원 중 내가 그를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두 가지 경험 때문이다.

일용직·임시직 건설노동자를 조직대상으로 하는 플랜트건설노조에서 조합원 임금체불 문제 해결은 노조 상근자들의 중요한 일상업무 중 하나다. 그는 2015년 새해 벽두부터 두 달 동안 세 군데 현장을 돌며 일을 했는데 줄줄이 임금체불을 당했다. 노조 사무실로 찾아와 한참 동안 체불로 인한 어려움을 호소했고, 상담을 마친 뒤에 상근 간부들이 방송차를 앞세워 현장으로 내달려가 떼인 임금을 받아 드린 경험이 있다. 나는 당시 건설노동자들에게 임금체불이 얼마나 심각하고 가혹한지를 느꼈다. '두 달 동안 세 번 체불이라니…. 지지리도 운이 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또 하루는 주말 아침 밀린 일을 하기 위해 사무실에 출근했는데 점심시간 무렵에 그가 아무런 예고 없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옆구리에는 시꺼먼 책을 한권 끼고 연신 싱글벙글 웃고 계셨다. “웬 책입니까?”하고 무심한 듯 여쭸더니 그제야 관심을 가져줘 고맙다는 듯 옆구리에서 슬쩍 꺼내 펼쳐 보이며 “이건 책이 아니고 우리 아들 교사 임용장이야”라며 우쭐하셨다. 30년 철일을 하며 힘겹게 자식을 키우고 장성한 아들이 어엿한 선생님이 됐다니 평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한참을 아들 자랑을 늘어놓으신 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와 얽힌 두 가지 경험은 플랜트건설노조에서 2년 상근활동을 하는 동안 건설노동자의 삶의 애환을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런 그가 노무사 사무실을 찾아왔다. 뒤늦게 반가운 인사를 나눈 뒤 따뜻한 커피 한잔을 대접하고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는 1980년대부터 조적·도장·철골·용접 등 직종을 가리지 않고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10년 전부터 허리 통증이 심해 병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러던 중 6개월 전 서울의 모 병원 신축 건설현장에 출근한 첫날 각파이프를 들어 나르다 바닥에 깔린 빔에 걸려 넘어진 뒤 추간판탈출 진단을 받아 수술을 했다. 이후 자식들이 보내 주는 용돈으로 살고 있으며 30년간 생업으로 삼아 온 철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막막하다고 눈물을 훔치셨다.

‘그러고 보니 사무실 문을 들어설 때부터 지팡이를 짚고 있었지….’ 30년간 건설현장에서 철을 만지며 살아온 거칠고 투박한 사내가 이제는 1미터 남짓한 가느다란 지팡이에 의존해 거동하는 모습에 애잔함이 느껴졌다.

서둘러 서류를 갖춰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요양을 신청했다. 하지만 수많은 건설노동자가 한평생 건설현장에서 몸 바쳐 일한 훈장으로 허리·어깨·팔꿈치·목 등에 근골격계질환을 얻어 고통받고 있지만 공단이 이를 퇴행성 질환으로 보고 산재를 불승인한 여러 사례에 비춰 볼 때 이번 사건 또한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산업과 고용의 특성상 한 해에도 수십 개 현장을 떠돌며 일할 수밖에 없고 불법 다단계 하도급과 고용보험 피보험자격 신고 누락 등으로 건설현장 근무이력을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운 점, 현장과 공정에 따라 작업내용이 제각기 다르고 정형화되지 않은 점, 산재요양신청 무렵 이미 공사가 종료돼 현장조사조차 실시하기 어려운 점, 건설현장에 제대로 된 작업환경측정이 전무한 점 등으로 업무와 질병의 관련성을 노동자가 스스로 입증하기 쉽지 않은 탓이다.

2015년 말 어느 날 아침 사무실을 찾은 건설노동자로 인해 잠시 잊고 있었던 건설현장 문제를 다시 생각해 봤다. 불법 다단계 하도급과 숱한 임금체불, 옷 갈아입고 몸 뉘어 쉴 공간조차 모자란 열악한 환경, 몸이 아파도 입증책임 장벽에 가로막혀 산재요양조차 편히 받지 못하는 현실 그리고 안타까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산재사망 노동자들….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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