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시중은행에 다니는 A씨는 요즘 휴대전화에 입력된 지인 연락처를 검색하는 게 일이다. 다음달 14일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출시를 앞두고 "오픈(출시)날 1인당 150개(계좌)는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A씨는 "오늘은 또 누구한테 권유해야 하나 싶어 출근하기도 괴롭다"고 호소했다. 은행에서 신상품을 출시할 때마다 지인들에게 죄인이 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시중은행들 '실적왕' 선정까지=아직 출시도 안 된 ISA를 선점하려는 경쟁이 과열되고 있다. 경쟁은 은행-증권사 간은 물론 은행끼리도 치열하게 벌어진다. 불꽃이 튀는 경쟁은 벌써부터 부작용을 낳고 있다. 불완전판매에 따른 소비자 피해 우려가 높아지고 ISA 유치전쟁 한폭판에 서 있는 금융권 노동자들의 고충도 나날이 커지고 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나서 "미스터리 쇼핑, 불시 점검 등 현장 점검을 강도 높게 시행하겠다"며 과당경쟁에 경고장을 내밀긴 했지만 보다 근본적인 방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28일 금융노조에 따르면 최근 은행별 ISA 관련 현황을 점검한 결과 고객유치를 위해 과도한 이벤트·프로모션을 하고, 핵심성과지표(KPI)에 성과를 반영하겠다고 통보한 곳이 적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대다수 은행들은 "ISA 출시 전까지 1인당 100~200계좌 유치" 같은 식으로 강제할당 물량을 설정했다. B은행의 일부 지역본부에서는 직원 1인당 하루 2계좌씩 사전예약을 받도록 했다. 사전예약한 고객이 계좌를 만들 경우 실적을 계산할 때 1계좌가 아닌 1.5계좌로 인정해 주고 있다. 게다가 지점 평가에 쓰이는 KPI 항목 중 캠페인 배점(2천점)에 ISA와 계좌이동제를 묶어 500점을 배정했다.

C은행은 사내망에 매일 판매실적을 집계해 상위 4명의 직원을 공개한다. 상위 직원들의 개인 실적을 전일 대비 혹은 직원 평균과 비교한 수치까지 보여 준다. 직원들의 경쟁심을 자극하려는 조치로 풀이된다.

D은행 직원은 "계좌이동제와 맞물려 실적경쟁이 장난이 아니다"고 귀띔했다. E은행 관계자는 "과당경쟁 우려가 높아지면서 본부 차원에서 지역본부쪽으로 강제할당을 하지 말라고 얘기했지만, 지역본부 자체적으로 매일 영업점 실적보고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ISA 구성에는 예·적금뿐만 아니라 주가연계증권(ELS) 같은 파생상품도 담을 수 있기 때문에 판매 전에 고객에게 원금손실 가능성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계좌수 늘리기에 집중하면서 고위험상품이라는 설명보다 절세상품이라는 것만 강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은행권 관계자는 "직원들 스스로도 불완전판매에 대한 스트레스가 상당하다"고 말했다.

◇노조 "금융당국 사후감독 머물러"=현장의 아우성이 높아지면서 금융노조도 움직이고 있다. 노조는 조만간 정부 당국자를 만나 'ISA 과당경쟁 방지책'을 요구할 예정이다. 특히 은행들이 ISA 판매실적을 KPI에 반영할 경우 불완전판매를 유발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은행은 직원들의 영업실적을 합쳐 영업점 KPI를 산정하고, 이를 기초로 성과급을 차등해 지급한다. 영업점별 실적경쟁이 붙는 이유다.

노조는 금융당국이 예고한 미스터리 쇼핑이나 불시 점검을 "사후감독"이라고 비판했다. 자칫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허정용 노조 부위원장은 "금융당국 스스로 ISA를 '국민재산 늘리기' 상품이라고 과대포장할 게 아니라 고위험을 추구하는 투자상품이라는 사실을 적극 알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조는 이와 함께 고객 1명당 금융사 한 곳에 1개 계좌만 만들 수 있는 ISA 운용방식을 재검토하라고 요구할 방침이다. 노조 관계자는 "과당경쟁에 나서는 이유는 고객의 예·적금, 펀드 파생상품 투자 등 모든 자산을 하나의 계좌에 통합하기 때문에 ISA 계좌를 개설하면 다른 금융기관으로 쉽게 계좌를 이동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라며 "여러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더라도 비과세 효과는 통합해 이용할 수 있도록 정책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조는 지난 26일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에게 'ISA 유치 관련 과당경쟁 자제 요청' 공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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