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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노동조합은 무엇으로 사는가 ⑥] 왜곡된 기억 재구성해 펼친 반대담론
편집부  |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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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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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은 국민 기본권을 박탈하고 인권을 짓밟는 공포정치를 했다. 한국전쟁 이후 자주적인 노동조합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오직 어용만 판치는 가운데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는 무권리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태일 사건이 발생했다. 전태일 사건이 자주적인 노동운동의 싹을 틔우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자주적인 노동조합의 싹을 틔워야 하는 시대적 무게를 청계피복노조가 걸머졌다. 미약한 힘으로 시대적 무게를 감당해야 할 당사자들의 고통과 고난이 얼마나 컸을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70년대 청계피복노조에 가해진 권력과 자본의 탄압은 가혹했다. 전태일 사건 이후 노동자 도시빈민 등 민중의 거센 저항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은 민중의 저항을 억누르고 장기집권을 획책하기 위해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온 나라를 공포분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러니 저항운동의 발화점이라고 할 수 있는 청계피복노조에 대한 집중적인 감시와 탄압이 얼마나 심했을 것인가.

청계피복노조 간부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탄압에 저항했다. 때로는 힘에 겨워 좌절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앞서 죽어 간 친구의 눈빛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이 떠올라 많은 번민을 하면서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그 괴로움을 안겨 준 근원은 다름 아닌 자본의 탐욕이요, 군부독재 체제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소한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근로기준법을 지키고 노동 3권을 보장한 상태에서 이들이 노동운동을 했더라면 어느 누구보다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텐데 현실은 그 반대였다. 일상적인 공간에서 사측과 힘겨루기를 통해 노동자 지위를 안정화시키는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문제는 공권력이 불법 부당하게 노조활동에 개입하는 것인데, 이승철 전 노조 지도위원은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채 노조가 지식인의 정치적 실험장이 돼 조직이 안정되지 않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근로조건 개선과 조직을 수호하기 위해 투쟁한 조합원들한테 그 책임을 전가하고, 우호세력인 지식인들을 원망하는 태도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식은 왜 생겼을까. 자신들의 명분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내부를 공격하고, 우호세력을 배척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전태일의 친구이자 노조 창립 주체라는 명분으로 권위가 만들어졌고 그 권위로 인해 권력이 형성됐다. 그런 것들을 계속 유지하고 이어 가고 싶으나 분출하는 조합원들의 요구를 효과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또 폭력정권의 불법 부당한 도발에 과감히 대응하지 못했다. 대신 이소선과 중간간부 그리고 조합원들이 과감하게 나서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명분·권위·권력에 균열이 생긴다고 생각해 그 책임을 오히려 동료와 우호세력인 지식인한테 돌린 것이다.

이런저런 투쟁이 많았으나 지식인이 사주해 행해진 것은 없다. 물론 조력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지식인들은 조합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했던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사건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죽음을 사주하는 지식인도 없었을 것이고, 죽음을 사주한다고 무조건 실행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도덕한 권력은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서 보듯이 죽음도 사주했다고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노조 집행부가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효과적으로 수용해 투쟁하면 더 큰 힘으로 발전한다. 좋은 사례가 80년 4월 ‘서울의 봄’ 당시 11일간 벌였던 농성투쟁이다. 노조는 임금인상과 10인 이상 기업에 퇴직금 지급을 요구했다. 집행부는 노사 교섭을 하고 중견 조합원들은 교섭이 결렬될 때를 대비해 투쟁을 조직했다. 교섭이 결렬되자 곧바로 농성에 돌입했고 투쟁은 날이 갈수록 열기를 더해 갔다. 이 투쟁은 결국 승리했다.

이처럼 조합원들의 투쟁 열기를 잘 수용했다면 더 큰 힘과 명분을 축적할 수 있었다. 조합원들의 의지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본다든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하려고 온갖 기억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 저자는 이러한 기억을 인용해 반대담론을 위해 무리하게 논지를 펼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70년대 청계피복노조를 말하면서 80년대 노동운동의 이미지를 연상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70년대에는 ‘선도투쟁’이라는 개념 자체를 몰랐다. 선도투쟁이 학문적으로는 어떻게 생겨난 용어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우리가 선도투쟁을 염두에 두고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선도투쟁 개념은 80년대 학생운동 출신들이 현장에 들어오면서 생겨난 개념으로 알고 있다.

70년대에는 여건상 농성투쟁이 주류를 이뤘다. ‘시위’는 매우 어려운 투쟁 형태였다. 70년대 청계피복노조 운동을 학생운동 방식과 연결 짓기 위해 시위를 거론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위, 즉 가두시위는 80년대 청계피복노조가 행사한 주요 투쟁형태였다. 이러한 이미지를 70년대 청계피복노조에 오버랩해 논지를 펼친 것 같다.

노동운동·노동조합에 정파운동이 들어온 것 역시 80년대 이후 현상이다. 70년대 청계피복노조라는 경공업 영세업체의 일개 단위노조에서 무슨 정치적 실험이 있었을 것이며 무슨 정파가 들어와 활동을 했겠는가.

지배담론에 반대담론을 제기하는 학문에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다만 사실과 정확한 자료에 바탕을 둔 연구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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