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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노동조합은 무엇으로 사는가 ③] 노동자들은 지식인들의 꼭두각시였는가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 저자는 ‘청계피복노조, 지식인의 정치적 실험장’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청계피복노조가 지식인의 정치적 실험장이 됐으며, 노조활동도 ‘학생운동 방식’이었다고 서술했다. 이런 주장의 논거는 청계피복노조 지도위원이었던 이승철의 인터뷰였다.

이승철은 청계피복노조가 지식인의 정치적 실험장이 됐다는 근거로 장기표 사례를 들었다. 사용주들이 정부의 세금인상에 철시(撤市)로 맞설 때 장기표가 노조도 힘을 합쳐 투쟁해야 한다고 했고, 한영섬유 노동자 김진수 타살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사건의 내막을 알려 주며 김진수의 어머니와 함께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먼저 세금투쟁에 대해 알아 보자. 1971년 9월3일 사용주들은 국세청의 사업소득세 부과액이 너무 높아 장사를 할 수 없다며 공장 문을 닫고 가게를 철시했다. 노조에서는 사업주들이 직장을 폐쇄할 경우 발생할 근로자(조합원)들의 실직을 방지하기 위해 국세청장에게 공문을 보냈다. 기업주에 대한 과세를 재조정하도록 요구하는 협조의뢰 건의서였다. 그 결과 국세청은 그해 9월6일 중부지방국세청장에게 실정에 맞게 과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관할 남산세무서(현 중부세무서)는 과세표준액 조정과정에 영업 부진, 일반경비 증가를 고려하고 과세표준 결정 과정에서 시장대표와 번영회의 자문을 받겠다는 내용의 회신을 했다. 이를 두고 지식인의 정치적 실험장이 된 노조라고 말한 것이다.

조세제도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근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세금투쟁과 조세저항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투쟁을 부추긴 것도 아니요, 그 부추김에 부화뇌동해서 과격한 투쟁을 전개한 것도 아니다. 다만 사용주들이 직장을 폐쇄함으로써 조합원들이 실직할 것을 우려해 건의서를 발송한 것에 불과하다.

또 다른 사례는 한영섬유 노동자 김진수 타살사건이다. 71년 3월 서울 영등포에 소재한 한영섬유에서 사용자측의 사주를 받은 깡패가 노동조합 탈퇴를 거부하던 김진수의 머리를 드라이버로 찔렀다. 김진수는 중태에 빠져 입원했으나 회사는 물론 상급노조조차 그를 방치했다. 김진수는 결국 두 달 만에 억울하게 숨졌다.

당시 도시산업선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김진수의 장례를 치렀다. 장기표가 이 사건의 내막을 알려 주며 김진수의 어머니와 함께 투쟁해야 한다고 이른 것을 두고 이승철은 "정치적 실험"이라고 했다.

억울한 죽음에 침묵하는 게 옳은 일인가

비록 같은 사업장 동료는 아니지만 노동자가 자본의 천인공노할 탄압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했는데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더구나 당시 전태일의 친구들은 얼마 전에 친구가 비극적으로 죽은 사건을 겪지 않았는가. 그 누구보다도 공감하고 공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도리에 속하는 문제다. 정치적 실험은 가당치 않은 말이다.

이승철은 인터뷰에서 “극한투쟁을 해야만 정부가 조건을 들어준다는 관례가 노조간부들 내에 존재했다”고 밝혔다. 다른 노조들은 가급적이면 법적 테두리 안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전개하고 문제가 사회화되는 경우 단위노조는 사측과 공권력에 의해 직접적인 탄압을 받았다. 반면 청계피복노조의 노사문제는 오히려 일상적으로 사회화됐다. 노조 자체 특수성과 지식인 대량 개입에 의해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저자는 청계피복노조가 재야 및 외부인사와 교류가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익명적 지식'에 의한 민주화 담론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정말 그런가. 청계피복노조의 경우 재야 및 외부인사와의 교류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이소선의 경우 재야 민주세력과 많은 교류를 했다. 뿐만 아니라 조합원들도 비교적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모두 노조활동에 ‘대량 개입’했다는 근거도 없고 사실도 아니다. 게다가 저자는 민주화 담론에 의해 극한투쟁을 해야만 정부가 조건을 들어준다는 관례가 있었다는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극한투쟁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극한투쟁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것을 말한다면 청계피복노조에도 다음과 같은 세 번의 투쟁이 있었다.

첫 번째는 70년 12월21일 경찰이 노조의 플래카드를 철거하면서 촉발한 사건이다. 플래카드에는 업주들의 방해에 맞서 노조가입을 홍보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플래카드 철거에 격분해 조합간부 12명이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하겠다며 농성에 돌입했다.

두 번째 투쟁은 77년 9월9일 일어났다. 당시 노동교실 실장이었던 이소선은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있다. 경찰은 노동교실을 강제로 막고 건물 주인한테 압력을 넣어 계약을 해지하게 했다. 분노한 조합원들은 노동교실을 돌려줄 것과 이소선 실장의 석방을 요구하며 결사투쟁을 선언하고 투신·할복을 하며 경찰과 맞서 싸웠다. 이 사건으로 5명이 구속되고 50여명이 연행됐다.

마지막 투쟁은 81년 1월30일 발생했다. 조합원들은 전두환 신군부가 청계피복노조를 강제로 해산하자 아시아아메리카자유노동기구(아프리) 사무소를 점거하고 농성을 했다. 진입하는 경찰에 맞서 석유를 붓기도 하고 투신을 하면서 항거했다. 이 사건으로 11명이 구속됐다.

지식인 사주 아닌 정권 위협에서 비롯된 '극한투쟁'

세 사건의 공통점은 공권력이 직접 노동조합의 존립 자체를 위협했고, 조합원들이 이에 맞서 목숨을 걸고 결연하게 저항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지식인 개입으로, 민주화 담론에 의해 단위사업장 노사문제가 사회화됐다고 말할 수 있나. 77년 노동교실 사건, 81년 아프리 농성 사건은 지식인 개입이 전혀 없었다. 물론 사건이 발생하고 난 이후 사회문제가 돼 우호세력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있었다. 그것을 가지고 민주화 담론이니 지식인의 정치실험이니 하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극한투쟁을 해야만 정부가 조건을 들어준다는 관례"는 또 무슨 근거로 한 말인가. 앞의 세 사건에서 보듯이 극한투쟁은 공권력이 개입해서 노조조직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때 생겼다. 즉 조직의 명줄을 끊으려 할 때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저항한 것이다.

청계피복노조는 70년대에 많은 투쟁을 했지만 공권력이 노조 존립을 위협하지 않을 경우 이런 '극한투쟁'을 하지 않았다. 이승철은 인터뷰를 통해 “지식인 학생 출신 활동가들은 무엇이든 '투쟁을 해야만 이뤄진다'는 것을 노동자들에게 강조했고, 이는 일련의 청계피복노조 투쟁이 '학생운동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만들었던 중요한 이유였다”고 했다.

'학생운동적 성격'의 투쟁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앞뒤 문맥을 봤을 때 노동문제가 사회화되는 방식을 뜻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농성이라는 방법으로 투쟁함으로써 그 투쟁이 사회에 알려져 사회화되는 것을 '학생운동적 성격'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를 증명하려면 노동조합이 교섭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는데도 굳이 투쟁을 했던 사례를 제시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단체협약 체결과 고충처리 등을 통해 근로조건 저하를 막고 향상시키기 위해 활동한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 교섭이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반면 노사가 대립할 때에는 투쟁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럼에도 무엇이든 투쟁을 해야 이뤄진다고 강요하는 지식인이 있다면 그는 노동조합을 잘 모르는 비현실적인 사람이다. 실천 주체는 현실에 맞게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꼭두각시가 아닌 이상 지식인의 강요에 의해 노조를 운영할 필요는 없다.

70년대 청계피복노조에 관계했던 학생 출신 활동가들은 모두 개인과 개인, 혹은 개인과 노조 간 연계로 움직였다. 학생 출신 활동가들과 노조는 조직적 관계가 아니었다. 조직적 상하관계를 맺고 지도하고 지도받는 관계가 아니라 개별적인 관계를 가지고 상호 간에 영향을 주는 관계였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고 그 영향력에 의해 다른 한쪽이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관계가 아니었다. 흔히 지식인 학생 출신 활동가가 일방적으로 노동자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실천적인 것에서는 지식인이 노동자에게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 전태일의 투쟁이 얼마나 많은 지식인·학생·종교인에게 감동과 영향을 미치고 삶의 방향을 바꾸게 했는지를 생각해 보라.

경찰서에 가면 경찰은 으레 노동자한테 누가 배후조종을 했냐고 묻는다. 노동자는 무식하니까 반드시 지식인이 배후에서 조종한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천박한 인식이다.

저자는 “장기표와 청계피복노조 및 서울지역 노동운동 활동가 간에 상당히 지속적인 관계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며 개별적인 관계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만약 장기표가 청계피복노조를 (민중봉기의) 전략단위로 생각했다고 해도 그것은 실천단계에서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걸러졌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소규모 피복업체 일개 단위노조가 어떻게 전략단위가 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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