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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노동조합은 무엇으로 사는가 ②] 1976년 4월 청계피복노조 간부들은 왜 물러났나
   
▲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청계천 평화시장을 비롯한 피복제조업체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전태일 사건이 계기가 됐다. 수백 개의 소규모 공장들이 밀집해 있는 곳에서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렵다. 전태일 사건으로 인해 사회적 관심과 이소선을 비롯한 친구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노조를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이렇게 탄생한 청계피복노조는 전태일이 죽음으로 외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는 노동자의 권리선언,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는 인간선언,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투쟁선언을 실천할 책무가 있었다. 물론 이것은 노동조합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며 노동조합의 기능에도 맞는 내용이다.

그러나 자본과 권력은 청계피복노조의 존재 자체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깊숙이 개입해서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해치려 했다. 사업주와 당국은 초창기 노조설립을 보장하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설립을 방해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분신을 시도하며 저항했다. 이후에도 노조의 정상적인 활동을 다양한 방법으로 탄압했다. 예를 들면 노조사무실 문제, 전태일 사진 게재 문제, 조합비 거출 및 전임급료 지급을 놓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뿐만 아니라 전태일 사건 당시 약속했던 근로시간단축과 다락방 철거, 임금인상, 주휴제 실시 같은 근로조건 개선에 관해서도 사회적 관심이 줄어들자 약속을 어기고 이전 상태로 되돌렸다. 그러면서 노조사무실과 조합간부들을 사찰·감시하고 노동교실 운영에 관여해 도시새마을 운동을 강요하는가 하면, 상급 어용노조를 통한 조합간부 심기 등을 자행했다.

자본과 당국의 이소선 배제공작

그리고 자본과 정보당국은 아들 전태일의 뜻을 살리기 위해 온몸으로 싸우는 이소선의 존재를 배제시키기 위해 다양한 공작을 펼쳤다. 돈으로 매수하려고 시도하는가 하면 물리적인 협박을 가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소선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자본과 권력은 이소선이 노동법상 근로계약 관계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노조운영에 관여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압박했다. 그들은 이소선을 노조에서 축출하기 위해 조합간부들을 이간질시키는 비열한 공작을 펼쳤다.

이는 노동조합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자주성을 심각하게 해치는 것으로 노동조합의 본래 기능을 못하게 하는 탄압과 간섭인 것이다.

이에 일선 조합원들이 자주성을 회복하고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됐다. 투쟁은 1975년 11월13일 전태일 5주기를 맞이해 추모의 밤을 개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조합원들은 전태일 추도식이 현장 노동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여의치 않은 평일(기일)에 마석 모란공원에서 형식적으로 개최되는 것에 반발했다. 그래서 현장 노동자들이 현장과 가까운 노동교실에서 추도식을 개최함으로써 조합원들의 참여와 투쟁의지를 다지는 행사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의 적극적인 참여하에 전태일동지추모위원회를 조직하고 추모위원회가 주축이 돼 75년 11월13일 노동교실에서 ‘전태일 동지 5주기 추모의 밤’을 개최했다.

그런데 당시 최종인 지부장 체제의 집행부에서는 이 행사를 치르지 못하도록 했다. 노조와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비공식 행사이니 노동교실 사용을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양측 간에 노동교실 사용문제로 옥신각신하다가 가까스로 추모의 밤을 열었다.

당시 집행부는 반대 이유로 노동교실 사전 사용허가 여부를 들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에 따르면 최종인 집행부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반대했다. “이 문제에 대해 이승철(당시 노조 지도위원)은 두 가지 논점을 제기했다. 한 가지는 추모의 밤과 같이 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행사를 노조가 직접 맡아서 할 수 있냐는 점, 다른 한 가지 논점은 지식인들의 노조 개입 문제였다.”

그렇다면 이승철이 말하는 두 가지 논점에 대해 따져 볼 일이다. 첫 번째 논거는 추모의 밤이 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행사라는 것이다. 과연 추모의 밤 행사가 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행사였는가. 이승철은 그에 대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당시가 아무리 유신독재 긴급조치 시절이라고 해도 기십 명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조 건물 안에서 다른 것도 아닌 추모식을 여는 것을 두고 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행사라고 인식했다면 그것은 권력에 너무나 주눅이 든 인식이 아닐 수 없다. 추모행사에서 "독재타도"나 "유신 철폐" 같은 반정부 발언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근로시간단축, 다락방 철폐, 주휴제 실시 등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수준의 발언밖에 없는 행사였다. 그야말로 계엄하에서도 허용됐던 ‘관혼상제’ 수준인 것이다. 물론 일반 가정에서 치르는 관혼상제와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실제로 이날 행사에서 실정법을 위반했다든지 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했다는 이유로 처벌이나 경고를 받은 예는 없었다.

또 한 가지는 지식인들의 노조 개입 문제다. 이승철은 추모행사가 지식인들이 개입, 즉 배후에서 조종해서 이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물론 지식인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만 지식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노동자들이 아무런 주체의식 없이 맹목적으로 지식인의 조종에 의해 움직였다면 문제가 있겠으나 그에 대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승철은 “지식인들의 특징은 대표자는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밑에서만 쑤시는 방식” 이라고 말했다. ‘밑에서만 쑤신다’는 표현이 상당히 거슬리기는 하지만 왜 밑에서만 쑤시게 됐는지 당시 상황을 성찰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일선 조합원들은 추모행사에 이어 근로조건 개선투쟁에 나섰다. 75년 12월24일 추모의 밤을 주최했던 중견조합원들이 중심이 돼 조합원들을 조직해 노동시간단축, 다락방 철거, 주휴제 실시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단식농성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집행부에서는 저녁 8시 이후 작업과 일요일 작업을 하지 못하게 조합간부들이 작업장을 돌면서 단속하고 위반하는 업체를 고발하는 활동을 했다. 그러나 수백 개의 공장을 조합간부 인력으로 모두 단속할 수 없었다. 일시적인 효과만 발휘했을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노동시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조합원이 주체적으로 근로조건을 개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조합원이 스스로의 힘으로 투쟁해서 쟁취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노동시간단축 투쟁으로 집행부 교체

노동시간단축 농성투쟁 역시 당시 최종인 집행부의 반대로 곡절을 겪었다. 집행부의 불참으로 조합원들로 조직된 투쟁위원회가 투쟁을 이끌어 나갔다. 투쟁은 집행부나 사회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하고 고립된 상태에서 진행됐다. 거기에다 당시 중부경찰서 정보과장이 전투복 차림으로 권총을 차고 농성장에 난입해 협박하는 등 탄압도 가중됐다. 그렇지만 최종적으로는 노동시간단축을 관철하고 다락방을 단계적으로 철거한다는 약속을 받고 농성을 마무리했다. 노동시간단축 농성투쟁의 승리는 실로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대중의 간절한 요구사항인 노동시간단축이 쟁취됨으로써 청계천상가 노동자들의 열화와 같은 관심과 참여가 이뤄졌다.

이것은 조합원들이 조합간부가 고충처리를 해 주면 수혜를 받는 객체에서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투쟁해서 개선해 나갈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 준 계기가 됐다. 노동자들이 직접 체험하고 보고 듣고 배우게 된 것이다.

실제로 75년 12월 노동시간단축 투쟁 이후 시간단축으로 인해 임금이 삭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업종별 조합원 모임이 활발해졌다. 특히 잠바업체 객공미싱사들의 관심과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뿐만 아니라 재단보조·시다 등 다양한 모임과 소모임이 유행처럼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에서는 75년 노동시간단축 투쟁 이야기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분히 의도적인 것인지 자료 부족인지 알 수는 없으나 청계피복노조의 중요한 전환점인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이다.

75년 노동시간단축 쟁취 이후 조합원들의 요구와 투쟁의식은 한층 높아졌다. 이듬해인 76년 봄 단체협약 갱신 체결시 임금인상 요구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시다 임금 직불제와 공임 인상, 퇴직금 지급 등 각종 요구가 쏟아졌다. 조합원들의 투쟁 열기가 뒷받침돼 76년 노사 임금교섭이 힘을 받을 수 있었다. 조합원들은 임금교섭이 실패할 경우 가두시위를 비롯한 투쟁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불발되기는 했지만 76년 3월26일 평화시장 내 인간시장에서 시위를 계획하기도 했다.

일련의 투쟁 중심에는 이소선 노조 고문이 있었다. 집행부 일부에서 직접적인 노사관계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소선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일었지만 그는 투쟁을 통해 얻은 조합원들의 지지로 맞섰다.

만약 이소선이 당시 정보당국의 공작에 의해 노조에서 축출됐다면 그가 아들 전태일의 "어머니, 내 뜻을 이어 노동자 편에 서 주십시오"라는 마지막 부탁을 더 이상 지킬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을 겪고 나자 최종인 집행부는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76년 4월16일 일괄 사퇴했다. 그동안 진행된 조합원들의 투쟁과 요구로 인해 더 이상 집행부로서의 명분과 지지를 유지하기 어렵게 됐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편집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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